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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의 형이상학](1) “인격화하기”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점주의 인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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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oolyule 작성일26-06-25 08:43 조회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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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식인의 형이상학』 김유리 2026.6.24

 

“인격화하기”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점주의 인식론

 

 

“이때까지는 보잘것없던 한 존재자가, 인격의 형상을 한 채 인간의 일에 영향을 미칠 능력이 있는 행위자처럼 (꿈꾸는 자에게, 병자에게, 샤먼에게) 자신을 드러낼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존재자들의 인격성에 관련해서는, 바로 “인격적[개인적]” 경험이 그 어떤 우주론적 도그마보다도 더 결정적이다.”(44~45쪽)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가 『식인의 형이상학: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에서 말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사유를 배우면서 과연 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 수 있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서구 근대성에서 인식하는 일은 주체와 대상을 “객관화하기”이다. 주관적 경험을 뺀 객관적 지식으로 세상을 설명하겠다는 말일 것이다. 이에 비해 아메리카 원주민의 개념에서 인식하는 것은 “인격화하기”이다. 지식의 대상에서 잠재된 주체성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을 때 가장 잘 아는 것이 된다. 후자의 경우 안다는 것은 대상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기보다 대상과 마주칠 때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더욱 잘 아는 일이 된다고 생각한다.

 

“객관화하기”

서구 근대성이 촉진하는 인식론은 객관주의적이다. 객관적인 앎을 얻고자 하면 대상과 주체를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주체의 속성들, 그러니까 알려는 마음이라든가 지적 능력 같은 것들을 대상에 관심, 충동, 의도 등을 대상에 투사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대상을 ‘탈주체화’한다. 그리고 주체도 객관화되어야 한다. 주체는 자기 외부에 있는 것을 볼 때처럼 자기 자신을 “외부로부터” 보는 데 성공해야 한다.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는 객관화를 인식론적 놀이라고 부른다. 이 놀이의 규칙에 따르면 ‘타자’의 형식은 사물이다.

 

“인격화하기”

아메리카 원주민 사유에서 인식한다는 것은 “인격화하기”이다. 인식하려면 인식되어야 하는 것의 시점을 취해야 한다. 그것의 시점을 취하려면 대상을 인격화해야만 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든 인간 집단들이 공유하는 기본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에는 다양한 유형의 주관적 행위자들이 살고 있다. 인간도 비인간(동물, 사물, 죽은 자, 질병, 날씨 등등)도 모두 자신을 인격으로 본다. 다른 인격들의 시점을 취하는 것에 능숙한 이들이 샤먼이다. 샤먼은 비인간적 존재자들이 그들 자신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그들을 바라볼 줄 알아서 종을 횡단하는 대화와 교섭을 한다. 사물들이 누구인지 알고자 하며 관계를 운용하고자 하는 아마존의 인식론에서 ‘타자’의 형식은 인격이다.

 

해석 행위

인식론은 세계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서구 인식론의 이상은 주체가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주변 환경의 “지향성”을 제로 수준으로 줄이고자 한다. 지식의 대상이 의식, 정신, 지성이 있어서 변덕스럽게 군다면 어렵게 얻은 지식이 계속 바뀌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지향성이라는 용어가 비인간과 인간 공통에 사용할 수 있는 말로서, 타자의 영혼이나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보았다.

샤머니즘의 참된 인식론이 겨냥하는 것은 체계적이고 의도적으로 알고자 하는 존재로부터 행위능력을 최고치로 끌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좋은 샤머니즘적 해석이란 사건을 진정으로 행위인 것처럼 보는 데 성공한 해석이다. 샤머니즘적 인식론의 풍경에서는 도서관이나 타문화 집단 속에서 펜과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북을 두드리고 방울을 흔드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식물을 안다는 것은 식물을 분류하고 동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풀(예를 들면 옻나무나 환각을 일으키는 선인장)에서 받은 자극이 그 풀이 나에게 주체적으로 행한 행위라고 보는 것에 성공할 수 있어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식물의 행위는 일정치 않다. 같은 풀이 하필 나에게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반대로 맹렬하게 집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의 설명대로, 만일 사물들이 주체화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인식하려는 자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해석의 실패이고, 샤먼의 여정에서도 무의미한 상태이다.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의 인식론에서 주체와 대상은 정도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객관주의적 인식론에서 주체는 완전히 분석되지 못한 대상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식론에서 대상은 아직 다 해석하지 못한 주체이다. 여기서 참된 인식에 도달하려면 대상은 인간의 얼굴을 한 동물이나 정신의 형식(“자신의 충만한 지향적 형식”)에 이를 때까지 발전되어야 한다. 알려고 하는 자는 최소한 어떤 주체와 “입증된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여기서 ‘입증된’이라는 표현의 뜻은 잘 모르겠다.)

 

관점주의 인식론

‘모든 사물이 인간이고 인간이란 또 다른 사물인 세계’에서 안다는 것은 관점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는 관점들이 마주치고 교환되는 것은 위험한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인식론은 정치적 기술이고 외교적 수완이 된다. 샤먼은 “인격화하기”의 인식론자로서 마주친 다른 관점이 되어서 보는 일에 능숙하다. 그리고 샤먼은 또 아무나 못하는 일을 하는데 그것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돌아오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일반화한 개념들이 앞으로 우리가 공부하게 될 내용들인 것 같다. 이이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서양이 자기 철학을 해체하도록 도움을 요청받는 원주민 철학이라고 말한다. 자연과 문화, 야생과 문명, 타자와 동일자를 구별하고 학문적 대상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고자 했던 인류학은, 지금 “인격화하기”의 노력 속에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쓰고 보니, 타인의 시선에 끄달리는 일은 인간중심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주적 존재로서 ‘타인’의 시선만이 아니라 더 발견해야할 시점들이 있다. 그리고 ‘끄달린다’는 것은 관점주의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끄달리는 나를 바라보는 그 무엇의 관점이 되어 바라보는 일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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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서 답답할 뻔했다. 하지만 안다는 것에 대한 원주민의 가르침을 생각하자면 여기서 나오는 내용을 객관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관점 속으로 들어갔다가 무사히 돌아나오는 것이 먼저 중요할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 시달려도 보고 매달려도 보는 주관적 경험을 통해 안다는 것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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