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의 형이상학]3,4장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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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임 작성일26-06-26 07:00 조회63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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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어의 맥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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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6-06-26 07: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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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바 맥주가 흐르는 인간
브라질 출신의 인류학자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의 책 『식인의 형이상학』의 1부의 제목은 안티 나르시스이다. 저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점주의와 다자연주의를 통해 나르시스적인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와 구조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다. 그는 개인적 경험을 갖고 하나의 시점을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모든 동물은 인간이라고 한다. 재규어는 자신을 인간이라 생각하며 인간은 카사바 맥주가 흐르는 먹이로 보는 관점을 갖는다.
3장 다多자연주의
저자는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을 통해 레비스트로스의 책 『신화들』을 다시 읽기에 도전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란 인간과 동물이 아직 구별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신화적 담론은 완벽한 투명성을 갖춘 잠재적인 선先우주론적 조건(카오스모스: 혼돈 속의 질서)에서 사물들의 현 상태를 현실화하는 운동을 기록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선우주는 인간과 비인간의 원초적 동질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차이’에 의해 고유한 질적 다양체들이 나온다. 신화적 ‘변신’은 들뢰즈의 ‘되기’의 한가지 형태로 재규어가 동물의 차원과 인간적 차원을 번갈아 가며 다른 사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잠재적 역량을 갖고 있어서다. 이러한 ‘자기’ 안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정신’이라는 일반개념의 특징적 속성이므로 모든 신화적 존재자는 정신으로(샤만으로) 이해된다.
신화는 서로 다른 관점이 하나로 모이는 ‘관점주의의 보편적 도주점’으로 어떤 존재 상태에 관해 말한다. 그 상태에서는 신체와 이름, 영혼과 행위, 나 자신과 타자가 전前주관적이거나 전객관적인 하나의 동일한 환경에 잠긴 채로 상호 침투한다. 그때 인간과 동물에게 부여된 공통 조건은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이다. 신화들은 인간을 통해 계승되고 보존된 특성들을 동물이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들려준다. 대중적 인류학이 인간성을 동물적 기반 위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면, 원주민의 사유는 반대로 동물을 비롯한 우주의 다른 존재자들이 예전에 인간이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인간이라고 말한다.
관점주의가 긍정하는 것은 동물이 ‘바탕에서’ 인간과 닮았다는 발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동물은 ‘바탕에서’ 다른 것이라는 발상이다. 관점주의는 인간/비인간의 차이를 각 존재자의 내부로 가져오는 강도적 차이를 긍정한다. 모든 존재자가 그들 자신에게는 인간이라는 양식으로 존재한다면, 다른 존재자에게는 그 어떤 존재자도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성은 각자에게 반성적인 것이지만(재규어는 재규어에게 인간이며, 패커리는 패커리에게 인간이다.), 상호적인 것일 수는 없다(재규어가 인간일 때 패커리는 인간이 아니다.). 관점들은 양립 불가능하며 자기 종 내에서만 인간일 수 있다. 오직 일종의 이중 국적을 누릴 수 있는 샤만들만이 관점들을 서로 소통하도록 할 수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점주의적 이론은 세계에 대한 재현들의 다원성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하나의 세계를 다르게 재현한다고 보지 않는다. 모든 존재자는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본다. 모든 존재자는 관점을 갖는 인간으로 세계를 재현한다. 이때 변화하는 것은 그들이 보는 세계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듯이 비인간들이 그것을 볼 때, 그들이 보는 사물은 다른 것이다. 즉 우리에게 피인 것이 재규어에게는 맥주이고, 죽은 자들의 영혼에는 썩은 사체인 것이 우리에게는 발효된 카사바다. 관점은 재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점이란 신체에 있지만 재현은 정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점에 자리 잡을 능력이 있음은 영혼의 역량이고, 비인간들은 정신을 가지는 한에서 주체다. 그러나 시점 간의 차이는 영혼에 있지 않다. 차이는 신체의 종적 특수성에 의해 주어진다. 동물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른 사물을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본다. 그들의 신체가 우리의 신체와 다르기 때문이다. 신체가 다르면 세계가 구성되는 방법도 다르다. 여기서 ‘신체’라고 부른 것은 어떤 아비투스, 에로스, 에소그램을 구성하는 존재 양식과 방법의 집합이다. 관점주의는 신체적 매너리즘이다.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느끼고 반응하는 몸의 습속으로 특정한 관점은 생성된다.
다자연주의는 각 종에 고유한 지성 범주에 의해 부분적으로만 파악되는 ‘사물 그 자체’를 전제하지 않는다. 다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피/맥주 유형의 직접적으로 관계적인 다양체들이다. 존재자의 한 가지 종에서 다른 종으로 이행할 때 변화하는 것은 그 영혼들의 신체와 그 개념들의 지시 대상이다. 관점주의는 불변의 한 가지 인식론과 가변적인 존재론들을 전재한다. 즉 재현들은 동일하지만 대상들이 다르고, 의미는 유일하지만 지시 대상은 여럿이다. 서구의 단자연주의는 유일한 자연의 변이성을 본다면, 원주민의 다자연주의는 변이의 자연성, 즉 변화하는 것 자체로서의 자연성을 긍정한다.
다자연주의는 단單자연주의와 대립하는 개념이다. 서구가 자연을 대상화하여 하나의 자연으로 개념화했다면 아마존 원주민에게는 각자의 신체가 경험하는 세계에 따라 많은 자연이 있다. 인간은 피로, 재규어는 맥주로, 모기는 밥으로 경험하는 각자의 다른 자연이 존재한다.
4장 야생적 사유의 이미지들
저자는 교차 된 두 가지 존재론적 도식을 통해 서구의 다문화주의와 원주민의 다자연주의를 대조시킨다. 첫째, 존재자들의 종 사이에 성립하는 형이상학적 연속성(유적 영혼)과 물리적 불연속성(종적 신체)의 조합이다. 이 조합은 원주민의 심리 형태적 다자연주의에 고유한 것이다. 둘째, 근대의 인간 중심적 다문화주의의 전형인 물리적 연속성과 형이상학적 불연속성의 조합이다. 이러한 조합에서 인간은 신체적 물질을 통해 다른 창조물과 소통하는 동시에, 정신적 실체 덕분에 다른 창조물과 절대적으로 분리된다.
저자는 그동안 인류학이 외부 관찰자로서 해왔던 비교를 비판하며 원주민의 관점주의와 다자연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애매성’과 ‘번역’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애매성은 일의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다양한 의미와 해석을 갖는 것을 말한다. 애매함은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수립하고 추동한다. 즉, 관점의 차이다. 인간이 말하는 카사바 맥주와 재규어가 말하는 카사바 맥주 사이에는 애매성이 성립하며, 번역이란 그 두 관점 사이를 왕복하며 차이를 놓치지 않는 작업이다. 번역하기는 애매함의 공간에 자리 잡고 거주하는 것이다. 번역하기는 애매함이 지금까지 항상 존재했고,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 것으로 추정하며 차이에 의해 소통하는 일이다. 애매함은 주관적 결점이 아니라 객관화의 장치다. 그것은 오류나 착각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관계의 제한적 조건이다.
저자는 아마존의 관점적 다자연주의를 통해 원주민-되기를 주장한다. 이는 우리 사유의 잠재성으로 존재하는 셀 수 없는 타자-되기들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다른 사유에 대한 경험은 모두 우리 사유에 대한 경험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우화’에서 백인들은 원주민들이 동물이라 선언하고 원주민들은 백인이 신이 아닐지 의심했다. 백인의 인색함과 원주민들의 관대함은 내가 타자를 신으로 만나는 순간에 또는 동물로 만나는 순간에 재현된다. 타자의 눈으로 재규어의 눈으로 맥과 패커리와 콘도르의 눈으로 만나는 세계를 생각해 본다.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때 그들의 자연과 만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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