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이 형이상학(4)] 나는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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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숙 작성일26-07-15 14:02 조회80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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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다
타자란 무엇인가를 묻기에 앞서 우리는 항상 ‘나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었다. ‘나’를 알아야 ‘타자’를 알 수 있다고 사유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결국 ‘타자’에 대비(對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단순하게 타자란 내가 아닌 나머지 사람들이라고 뭉뚱그려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는 늘 ‘사람’이어야 하는 단서가 있었다. 인간은 인간의 정체성에만 관심이 있었고 인간만이 정체성을 운운할 수 있다고 단정했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인류학책들은 전혀 다른 시점을 제시한다. 자크 데리다는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에서 ‘타자’를 인식했다. 심지어는 동물은 자기의 관점이 있으며, 그것도 ‘절대적 타자의 관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식인의 형이상학』은 ‘타자’를 아니 ‘타자성’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저자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는 난해하지만 비교적 세부적으로 아마존 원주민의 식인 풍습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타자성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하지는 않는다. ‘타자의 형식은 곧 인격’이라고 하는 정도가 조금 이해할 만하다. 원주민의 인식론적 관습은 어떤 대상이 불완전하게 해석된 주체이므로 그 대상을 알기 위해 인격화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51쪽) 또한 인간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인간 중심적 사고와는 격하게 충돌(53쪽)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사유의 잠재성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타자-되기들을 현실화 하자고 한다.
‘되기’는 변신이다.(57쪽) 단순히 흉내내기가 아니다. 변신을 통해 관계 맺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과 비인간으로 세계를 바라보지만, 동물 역시 스스로를 인간으로 본다. 동물에게는 인간이 동물이다. 동물의 시점에서 인간은 단지 먹이일 뿐이다. 그러기에 원주민들은 사냥할 때 잡으려는 대상으로 변신했다고 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로 변신해야 하고 재규어를 잡으려면 재규어로 변신해야 한다. 단순히 무엇인‘척’이 아닌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즉 나를 버리는 것이다. 이는 마치 불교의 공(空)의 개념과도 겹치는 것 같다. 내가 동물이 되는 순간 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되기들의 배치는 리좀적 다양체라고 말한다. 다양체는 빼기에 의해 얻어지는 것, 고정된 나를 버림으로써 얻는 것이다. 그래서 되기와 다양체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203)
그렇다면 ‘되기’의 관점에서 식인을 보자. 이때 식인은 단순히 고기를 먹는다거나 상대의 육체를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흡수함으로써 그의 관점이 되는 것이다. 즉 식인은 적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내 안에 그를 통합하는 과정이다. 원주민들의 타자성은 단순한 이해의 차원이 아닌 섭취 과정을 통한 통합 과정, 즉 되기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극단적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타자성에 대한 관점이 근대적 사유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을 다시 불교의 공(空) 관점과 연결해 보면 고정된 나 또는 중심으로 붙박혀 있는 ‘나’란 없으며 ‘나’는 변하는 것이다. ‘되기’를 통해 계속 새로 태어난다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되기를 통해 ‘타자’가 되고 그러한 관계 맺음 속에서 계속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 관계 맺음이 우주의 기본값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동일자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모두가 그냥 ‘타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로부터 흡수한 것은 그의 타자성이라는 기호였고, 목표로 삼은 것은 ‘자신’에 대한 시점으로서의 그 타자성이었다.(175쪽)
‘타자’는 또한 잠재적 인척 관계인데 이는 혈연 관계가 아닌 적대자의 관계다. 원주민들에게는 혈연보다 전쟁에 기반한 동맹관계가 우선하며 이것은 국가에 맞서는 동맹이기도 하다. 이것은 동종 혈통의 생산 양식이 아니라 포식 양식이다. 즉 식인에 따라 타자를 내부화하므로써 적대자에 의해 자기를 규정하기 때문이다.(231쪽) 즉 ‘우리’가 아닌 ‘타자’인 관계이다.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는 순수한 잠재적 인척 관계 또는 메타 인척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척은 바깥의 존재들, 즉 ‘타자’로서 나와 관계를 맺는 존재들, 언제든 적으로 먹거나 먹힐 수 있는 존재들이다.
『식인의 형이상학』이란 책을 보는 과정 중에도 식인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식인’을 그저 잔인한 풍습 정도로 알고 있었던 편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떤 풍습이나 제도를 보는 것은 그 안에 내재해 있는 전체를 살필 줄 아는 통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반드시 ‘너가 되어’보는 것이다. 식인은 할 수 없지만 그만큼 처절함이 필요하며 반드시 ‘되기’가 되어야 한다.
[12장 발제 요약]
<사유의 되기>
‘되기’에 대한 결론을 12장의 발제 요약을 통해 내려 보려고 한다. ‘식인’의 풍습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식인을 했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리고 저자는 왜 굳이 ‘식인’의 관점이 필요했는지도 궁금했다. 12장에서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저자의 사유가 그 답을 준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우리처럼 사유하는 것은 맞지만 그들이 부여하는 개념은 우리의 개념과 매우 다르다. 즉 그들이 사유하는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 모두와 인간 이외의 비인간적인 다른 주체들도 그들과 똑같이 사유한다고 사유한다.
저자는 원주민의 관념이 인류학의 관념과 동일한 평면 위에 있다고 고려한다. 그것은 두 가지 문화를 이어주는 지적 이해 가능성의 관계라고 본다. 그 개념들은 언제나 반대편을 가리키는 벡터, 맥락을 횡단하는 경계면이다. 이 경계면의 기능은 바로 ‘동일자’ 한가운데 있는 ‘타자’, 저기와 같은 여기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유하기>
사유하기란 우리가 사유하는 것, 즉 타자의 사유가 비합리적인지, 이성적인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양자택일의 용어들로 사유하지 않는 것으로서 그 타자의 사유를 사유하기, 또는 완전히 낯선 어떤 것으로서 그것을 사유하기다. 그 사유가 사회적으로 규정된 인식의 전달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 세계에 대한 문화적으로 특수한 시선을 표현하는지, 정치권력 분배의 법적 유효성을 기능적 측면에서 인정하는지 등을 비롯하여 타자들의 사유를 중립화하는 다른 모든 형식들을 괄호 안에 집어넣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중단하거나, 최소한 인류학이 그것에 갇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저자는 타인의 시선 속에 있는 그대로의 세계, 예를 들면 ‘식인’이 단지 잔인하고 미개한 풍습이라고 여겨졌던 그 시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같다. 또한 그 안에 있는 표현되지 못했던 절절한 ‘타자성’에 대한 관점을 증식시키는 것이 인류학의 임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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