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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세 번째 시간 후기_형식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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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수정 작성일25-03-03 16:57 조회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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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세 번째 시간 후기

2025.3.3. 최수정

형식이 필요해!

 

 

이번 시간에는 형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우리에게 글을 쓰는 형식이 왜 필요할까. 달님은 형식자체에 대한 의미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형식이든 그 자체의 역사성이 있다. 그 형식이 오랫동안 지켜진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것을 따르면서 자발적으로 그 형식을 만든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형식을 만든다. 커플 관계를 맺을 때 커플 반지를 만들어 그 관계를 개시한다. 어떤 관계를 만들기 위해 단체 티를 만드는 일도 이와 같다. 형식이 만드는 질서로 들어가며 공적 인정을 얻는다. 형식을 따르는 일은 힘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각자가 자신의 기량을 넘어서기는 문턱을 만들어 자기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일정한 형식 기준을 자진해서 받아들이며 자발적 제약을 약속한다. 그로 인해 나는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형식적 제약을 일단 받아들이면서 그것과 함께 다른 형식을 제안하고 발견할 수 있는 장으로 들어서며 자신의 성장을 기대한다.

우리는 세미나를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세미나 시간이 끝나면 각자의 책임과 의무가 있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세미나 시간은 그런 일상의 예외적인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이 시간을 위한 형식의 존중이 중요할 수 있다. 이 형식은 세미나에만 적용되는 규칙이다. 내가 미리 제시된 형식에 맞출 때만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미나가 작동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형식’(몸체)이 있다. 형식을 바탕으로 내용을 만들어간다. 달님은 모든 종교가 영적 형식(의례)을 개발한다고 했다. 종교는 형식을 만들기 어렵다. 성스러움에 대한 추상성 때문에 오히려 내용을 만드는 일에 힘을 쏟는다. ‘형식이란 우리에게 실재적 감각을 준다. 형식이 만드는 사고체계로 내용과 만나면서 의미를 만든다. 형식을 지키는 순간 우리는 그것과 함께 있게 된다.

 

 

두 존재 형식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의 전일적’(그 자체로 완전한 느낌)을 갖고 진화했다. 호모 사피엔스 종인 현생 인류의 기억에는 네안데르탈인으로 살았던 수백 만년의 기억이 남아 있다. 현생인류는 여전히 그 전일적 감정을 안정감으로 느낀다. 인류는 먼 옛날의 생물학적 느낌을 되새기고 싶다. 현대의 종교는 네안데르탈인 시절의 그 전일적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뭔지 모르지만 나를 끌어당기고 연결하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급변하는 자연환경에서 네안데르탈인은 노래를 부르면서 불안과 공포를 달래며 한 자리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는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끝없이 걸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걸으면서 계속 타자()를 만났다.알고 있던 것과 다른 사물과 사건을 만나 새로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더 많은 의사소통의 기술이 필요했다. 다른 무리를 만날 때 다르다는 것을 생각했던 호모 사피엔스는 레퍼토리를 빨리빨리 바꾸기 위해서 노래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더 복잡해진 의사소통 체계, ‘지시적 소통이 필요해졌다. 지시로 때로 눈앞에 있지 않고 멀리 있는 것을 가리켜야 했다. 그래서 더욱 그들에게 일정한 한계와 기준을 정하는 형식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전일성초월성을 모두 갖고 있었다. 나와 타자는 같은가 다른가. 그들이 를 인식하는 정신은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분열증과 종교

타자를 인식하기 시작한 호모 사피엔스는 반대 급부로 개별적 존재인 를 인식하게 됐다. ‘너머 를 사고하고, 그것을 다시 통합해 우리를 생각하게 된 호모 사피엔스의 초월적사고는 본래적 사고인 경계상실’(케노시스)의 문턱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나의 경계를 오가는 형식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해졌다. 나를 넘어서는 경험을 한 후에 나에게 다시 돌아와야 하는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호모 사피엔스는 분열증에 시달렸다.

호모 사피엔스는 의 경계를 상실하며 자아의식이 약해지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저자에 의하면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 시절 경험했던 행복감이었다. 자기 안의 힘으로 부르는 노래는 자기 존재의 고양감을 준다. 내 존재 자체가 확장되는 것 같은 부푼 느낌이 완전한 충만감을 주는 것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이런 고양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나 국가도 인류가 느끼는 원초적 전일성을 이용해 사회를 설계하려고 했다. 인류의 오랜 경험을 자극하여 일체감을 만들려고 했고, 그 일환으로 종교가 발달했다. 종교가 분열증을 앓는 인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달님은 현대 전쟁은 다 종교전쟁이라고 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쨌든행복감을 주는 전일적느낌은 위험하다. 그 자체로 선·악을 따질 수 없는 이 맹목적 느낌이 집단 간의 협력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하지만, 반대로 배타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 음악은 파시즘적 전체주의에 이용되기도 한다. 파시즘이란 의 확장이다. 특별하고 개별적인 ’, ‘ego’가 확장된다. 이것은 를 너머 를 경유해서 우리를 인식해가는 질적 확장이 아니다. 모두 똑같은 얼굴을 가진 단 하나인 의 양적 확장이다.

 

 

노래의 이중성

이번 세미나 발제를 맡으신 이성근 선생님은 노래와 관련된 군대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셨다. 죽을 만큼 힘든 훈련과 가혹 행위도 참고 이겨내게 했던 것이 희한하게도 목청껏 함께 외치는 구호와 노래였다고 한다. 공동으로 부르는 노래의 힘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 순간 이성근 선생님이 느낀 힘은 나의 질적 확장이었을까? 양적 확장이었을까? 달님은 이성근 선생님이 군대에서 부르던 그리운 어머니는 나를 참고 견디게 하는 악마였을 수 있다고 했다. 전일적 감각으로 삶을 고양시키는 노래가 아니라 나를 죽음과 합일시켜 생명을 무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노래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죽음으로 이끌 정도의 고통도 참게 하는 노래는 나를 우주와 합일하게 하는 네안데르탈인의 노래와는 다르다. 그것은 만을 주장하는 특정한 힘이 나를 압도하려는 의도를 갖고 노래를 이용한 것이다.

달님은 국가는 사회를 만들 때 의 양적 확장이 안 되는 방식으로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고 했다. ‘종교는 네안데르탈인이 느꼈던 전일감과 연관이 깊다. 우주와 합일되는 감정을 느끼고 싶은 인류의 생물학적 기억이 음악을 발달시켰다. 스티븐 미슨은 인류가 문자의 사고체계에 갇히는 것을 막기 위해 엄청 애를 썼다고 했다. ‘노래를 부르며 나를 전일적 합일로 느끼는 대신 문자에 사로잡혀 위험한 전체성에 포섭되는 일을 방지하려 했다. 하지만 문자 세계로의 발달은 피할 수 없었고,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에 의하면 문자의 사고체계를 중화시키는 음악이 필수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음악이라는 형식과 함께 어떤 내용을 만들어갈지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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