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의 시련] 일상적인 성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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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숙 작성일26-03-19 05:33 조회36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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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류학 3교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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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성스러움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1986)는 “종교적 인간”이라는 개념, 그리고 ‘성스러움과 속됨’의 구분으로 유명하다. 그는 종교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성스러움은 일상적 세계를 넘어서서 질서와 의미의 근원이 되고, 속됨은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세속 세계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성스러움을 지향하며, 이때 성스러움이란 일상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깨달음을 갖는 순간, 어떤 상황이나 물건 또는 장소가 나에게 특별해지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보았다. 종교는 성스러움의 체험이고, 인간이 내면의 혼란을 겪을 때 중심을 잡아 주고, 삶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스스로를 가치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성스러운 체험은 일정한 통과의례에 의해서 인간이 자신을 창조해 가는 과정이다. 그 통과의례는 히말라야의 동굴이 될 수도 있고, 율리시스가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기도 하며, 오랜 기간 요가를 수련하며 의례를 행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삶의 변화일 수도 있다.
율리시스(Ulysses)는 지혜와 모험을 상징하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데 무려 10년이나 걸린다. 엘리아데는 율리시스의 여정, 그의 여행을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으로 보았다. 율리시스의 시련은 종착지에 도달하는 과정이고, 귀향은 곧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며 이것이 성스러움으로 가는 통과의례다.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미로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다면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미로(labyrinth) 안에서는 길을 잃고 혼란을 겪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조차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결국 그 미로에서 빠져나와 길을 찾는다면, 그는 진정한 인격체로서 성스러워지는 것이며 이것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인 것이다.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현실 세상에서 우리는 현실적인 가치를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돈과 명예와 같은 현실적인 가치가 해법이 되지 못할 때 길을 잃는다. 갱년기나 노년의 시기가 되면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고, 때로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이때 자존감은 하락하고 정체성은 혼란스러워진다. 인생의 끝에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노년의 삶에 대해 과거의 경험은 무용지물이 된다. 삶과 죽음에 대해 통찰해야 할 이유를 모를 때 사유는 좁아지고, 준비 없이 맞이하는 노년의 시간 앞에서 지혜는 빈곤해진다. 그런데 이렇게 길을 잃고 미로를 헤매며 맞이하는 미로의 시련은 우리에게 성스러움에 다가갈 기회를 준다. 그리고 그 과정을 잘 겪어내어 자신에게서 다른 모습을 발견했을 때, 즉 자신의 깊은 내면을 자각했을 때 그 과정은 통과의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스러운 체험이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의 안녕’을 기원하는 조금 일상적인 성스러움은 어떨까?
신에 대한 존재 여부가 혼란스럽고, 성스러움에 대한 자각이 없을 때 종교는 삶에 무거운 존재가 된다. 조슈아 레이놀즈의 『아기 사무엘』이란 그림이 생각난다. ‘오늘도 무사히’라는 부제를 붙여 싸구려 액자에 담아 벽에 붙여 놓았던 그 그림, 택시나 버스에서도 흔히 보았던 그 그림에는 ‘오늘도 무사’하기를 바라는 모두의 염원이 있었다. 성스러움은 그런 것이 아닐까? 일상의 평안을 기원하는 한마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되뇌는 가벼운 기도, 가치판단에 대한 분별조차 감싸안을 수 있는 너와 나의 관계, 오늘 하루의 평안함에 대한 감사, 이런 것들이 신과의 관계 맺음이고 성스러움이다. 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내면 깊숙이 자신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의 성스러움을 깨달았을 때, 그러한 끊임없는 열망을 추구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향한 여행이 되며 또한 자유로움에 다다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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