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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 데리다의 뒤쫓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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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oolyule 작성일26-06-03 17:36 조회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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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 김유리 2026.6.3

 

데리다의 뒤쫓는 글쓰기

-환유란 무엇인가

 

“‘내가 있다/이다(je suis)’의 역사, 즉 ‘나’로서의 자기에 대한 자전적이고 자기-지시적인 관계의 역사를 대문자 ‘동물’의 역사, 즉 동물에 대한 인간 개념의 역사와 엮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루어 보려 합니다.”(80)

 

자기에 대해 쓰는 동물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의 강의문이다. 편집자 서문에 보니 이 글은 1997년에 공부의 낙원일 것 같은 ‘스리지’라는 장소에서 열린 열흘간의 컨퍼런스를 위해 쓰였다. 이 학술 회합의 표제는 ‘자서전적 동물’이었다. ‘자기를 쓰는 동물’이라는 이 정체 모를 주제는 그보다 앞서 있었던 두 회합의 주제 ‘인간의 종말’과 ‘경계 가로지르기’의 맥락 속에서 의미가 드러난다. 인간의 끝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가로질러서 동물에게로 다가가는 사유의 궤적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 글은 집고양이의 응시 앞에서 벌거벗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한 철학자의 상황에서 시작한다. 데리다의 글은 철학자의 목욕탕에서 출발하여 창세기로 거슬러 간다. 그리고 신의 응시 앞에서 동물 타자를 희생하며 자신을 유지해온, 아담 이래의 인간 역사의 끝에 다다르면서 ‘키메라’라는 혼종 동물을 발견하고 있다.

그런데 글이 왜 이런 모양인지 모르겠다. 분량만 따지자면 그렇게 긴 것도 아닌데 인접한 내용으로 조금씩 연결하면서 하염없이 이어지는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해서 결론이 언제 나오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발표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나처럼 느꼈을까? 아니다. 사람들은 더 듣고 싶어 했고 열흘의 일정도 모자라 대회 마지막에 즉흥적으로 세션을 추가했다고 하니 그 열띤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환유로서의 글쓰기

“만약 나라는 동물이 언젠가 자서전(지적이건 정서적이건)을 쓰려고 마음먹는다면, 스리지라는 이름을 반복해서, 한 번 이상 그리고 하나의 방식 이상으로-그 고유명과 환유의 명성 속에서-되뇌어야 할 것입니다.”(19)

 

철학자들은 말할 때 힘들겠다. 위 인용문에서만 해도, 가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동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언젠가라는 시간은 언제인가 등등 말 하나하나를 다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철학의 일이니 말이다. 다행히도 독자인 나는 건너뛰어서 ‘고유명과 환유’라는 못 들어본 말에만 신경을 쓴다. 혹시 데리다가 글을 쓸 때 ‘반복해서, 한 번 이상 그리고 하나의 방식 이상으로’ 하염없이 연결해가는 것과 ‘고유명과 환유’라는 개념이 관련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먼저, 고유명 붙이기란 창세기 1장에서 아직 선악을 모르던 아담이 신 앞에서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와 연결된다. 동물 ‘명명하기’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 짓기’와 관련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단지 말에 불과할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없도록 심연을 파는 것이 인간과 동물 일반에 대한 철학적 구분일 것 같다. 데리다는 무수한 서로 다른 동물들에 대해 동물이라는 일반명을 붙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고유명을 갖는 것과 일반명을 부여하는 것은 명명하기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관계성에 있어서는 달라진다는 것일까? 그것은 다시 확인하기로 하고, 지금은 글쓰기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니까 환유에 대해 생각을 더 해보자.

환유는 은유처럼 동떨어진 무엇으로 대체하지 않고, 가까이 있는 것으로 연결시키는 수사법이다. 데리다는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실은 무엇을 ‘쫓아가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쫓아간다는 것은 자취를 따라가는 행위다. 데리다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나는 나다’라고 동어 반복적으로 말하는 대신 ‘나는 나를 쫓아간다’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 말에서 자기와의 관계의 성격이 달라진다. ‘내가 곧 나’인 것이라면 자기와의 관계는 독백적이다. ‘나는 곧 나’라는 것은 그 자체로 결과이자 답이자 약속이자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의 부끄러움이다. 그런데 나라는 것이 ‘내가 쫓아가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누군지 아직 모르는 상태다. ‘나를 쫓아가는 자’는 내가 누구인지 물을 상대방(타자)를 찾는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요?’라고 묻고 상대방의 응답에 귀 기울인다. ‘쫓아가는 나’는 대화적 관계 속에 있다. 이에 비해 ‘나인 나’는 상대방에게 묻지 않는다. 함께 있는 상대방에게 ‘너는 동물이야, 너는 대답할 수 없어’라고 말하고 말 없는 응시를 되돌려 받을 수 있을 뿐이다.

글을 시작하면서 데리다는 철학자로서 자신은 ‘말에’ 의지할 것이고, 말할 것에 대해 ‘끊임없이 말할 것’이라고 알린다.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고’ 말을 하고 싶다고 한다. ‘단 하나의 어구’를 말할 때 그 어구와 다르게 ‘뒤따를 하나의 어구를 구상하거나 시도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것을 그는 쫓아가는 행동이라고 말하고, ‘원숭이 똥구멍’ 노래처럼 환유적으로 이어가는 문장을 만든다. 데카르트가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고 마침표를 찍었다면, 데리다는 그 동사에 빗금을 긋고(긁고, 할퀴고, 새기고, 쓰고) ‘나는 쫓아간다’라고 쓴다. 그리고 무엇을 쫓아가는지 그 흔적을 발견하는 대로 앞선 말들을 뒤따르게 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나는 나’인 것이 아니고 ‘나는 쫓아감’이다. 나는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로 존재할 수 없을 때의 부끄러움 속에 ‘실존’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무언가를 따라가는 중으로서 그 무언가와 함께인 상태가 된다.

 

경계 먹이기

그렇게 쫓아다니면 무슨 일이 일어나길래 그렇게 하는 것일까? 데리다에게 흔적을 쫓아다니는 말하기란, 철학이 설정한 경계의 심연을 건너가는 방법이다. 71페이지부터 이어진 경계론도 대단하다. 데리다는 3차에 걸쳐서, 열흘씩 이어지는 학술대회 내내 그의 ‘말할 것’, ‘말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다름 아닌 경계를 먹여 기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경계를 돌파하는 것도 아니고 삭제하는 것도 아니고 살찌운다니 무슨 소리인지? 철학은 인간과 동물 사이를 가른 경계선 양단에 있는 개념들을 살찌우고 길들여왔다. 그와 다르게 데리다는 단선적이면서도 심연인 경계에다가 많은 선을 거듭 그어서 경계를 두껍게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많은 선을 그어서 두꺼워진 경계는 격자나 그물 같은 모양이 되고, 그 위에서 횡단들이 벌어진다. 신의 응시 앞에 선 아담에게 동물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지금까지 번제물이 되어온 형제들이 드디어 에덴동산을 벗어난다. 동물들은 그들을 동물이라는 일반명 속으로 몰아넣은 철학자들의 책갈피마다 함께 있었던 동물 친구, 선생님들이었다는 것이 서서히 드러난다. 데리다는 몽테뉴의 고양이, 니체의 말, 마르크스의 고슴도치, 하이데거의 원숭이, 자신의 누에, 소크라테스의 등에 등등을 환기시킨다. 서양 철학사는 여러 동물들의 결합물인 키메라 괴물을 퇴치하려고 했던 역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데리다의 글에서 철학자들이 자기 동물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사실 철학자들은 언제나 동물에게 나는 누구인지 물으며 동행한 사람들이었던 것만 같다.

처음에 어렵고 산만하다고 느껴졌던 데리다의 글 속에 갈피마다 중요한 주제들이 있어서 조금씩 다시 살펴보게 된다. 철학적 사유는 경계에서 시작하는 것이지만 사유는 곧 관계를 위해 하는 것이라는 것도 배우게 된다. 철학은 말로 하는 사유이므로 데리다의 말은 사유를 끊는 것이 아니고 이어가는 것이어야 했고, 데리다는 그러한 말하기에 대해 구상하고 시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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