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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시련 (1) 후기] 통과의례적 공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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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헤미안 작성일26-03-09 12:16 조회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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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3.6/ 종교인류학 1차시 후기(미로의 시련1)/ 박서영

  

통과의례적 공부하기

 

미로의 시련이라는 텍스트의 제목에 대해 논의하면서 종교인류학 첫 시간이 출발하였다. 미로에는 메이즈(maze)와 레버린시(labyrinthe)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놀이에서 주로 사용되는 메이즈는 찾는 이를 헤메게 하는 걸 목적으로 설계된 것이라고 했다. 그에 반해 레버린시는 찾는 이로 하여금 중앙을 향해 나아가게 하면서 마침내 핵심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한국어로는 주로 미궁으로 번역된다고 했다. 엘리아데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 모든 인간 실존이 연속되는 통과의례적인 시련과 시험의 연속이다. 인간은 무의식적이거나 의식적인 일련의 통과의례에 의해서 그 자신을 창조해 가는 것”(p52)이라고 하면서 본질적인 인간다움, 원질, 원형을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레버린스를 미로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미로의 시련이란 인간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를 인간이 능동적으로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려움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차시 수업 준비를 하면서 내가 가장 크게 가졌던 의문은 성스러움(근원적 정신p6, 인간조건의 고대적·야생적·일상적 뿌리들p7)을 발견하는 방식에 대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일상을 사는 방식과 다른 차원의 어떤 시선을 장착해서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들과 감응하면 된다는 것인지, 혹은 근원적인 영적 여행을 통해 찾아야 하는 것인지가 헷갈렸다.

Q&A를 통해 통과의례를 통한 변형을 계속 함으로써 인간다움에 다다를 수 있다는 텍스트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 과정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통과의례들을 하나씩 통과함으로써 차츰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것이 마치 미로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것과 비슷했다.

인간에게 처음부터 이런 과정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구석기 시대까지는 성과 속의 구분, 삶과 죽음의 경계, 이원성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성과 접속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먹고 먹히는 관계 속에 존재했던 구석기인들에게는 삶과 죽음도, 성과 속도 하나였다. 신석기 혁명 이후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가축화시킴으로써 인류는 자연에 인위적인 조작을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재배할 식물과 사육할 동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그 능력에 대한 불안감도 함께 가졌다. 그것은 그들이 선택하지 않은 다른 항들에게 있을지도 모를 어떤 가능성에 대한 부담감이었다. 그러한 부담감을 떨쳐내고자 인류가 피의 희생제의를 지내는 과정에서 삶과 죽음이 경계 지어지고, 성과 속에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그러한 성과 속의 구분은 점점 심화되었고, 속의 세계에서 성스러움과 적극적으로 접속하기 위한 장치로써 통과의례가 생겨났다고 했다. 각 문화적 전통과 양식에 따라 통과의례는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되었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은 같았다. 하지만 문제점은 현대문명 속에서 사는 우리는 더 이상 통과의례가 경험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레버런스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순전히 개인이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통과의례 자체가 집단적으로 구축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 스스로 그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하기에 엘리아데는 전통문화를 공부하고, 이전에 존재했던 영적인 장소들에도 가보고, 현대에서 통과의례적 기능을 해주는 훌륭한 책들을 읽으면서 서서히 찾아갈 수 있다고 했다.

의문이 또 생겼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공부라는 정신작용을 통해 원형, 실존, 인간다움, 자신을 창조하는 것 등 엘리아데가 미로의 목적이라고 했던 것들을 이론적으로만 이해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신화적 신성이 물질과 결합되어 있듯이 공부도 물리적 활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이 부분은 좀 더 탐구해 들어가야 할 듯하다).

결론적으로 엘리아데에게 있어 책 읽기란 무엇인가가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 엘리아데에게 책 읽는 행위는 통과의례로 가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 하지만 읽는 과정이 어떠냐에 따라 책읽기 과정 또한 통과의례적으로 기능 될 수 있다고 했다. 능동적으로 자기 안의 역동성을 높은 수준으로 발휘해서 깊이 있게 책을 읽고 읽은 것을 풀어내어 쓰기를 반복한다면 그 과정은 이미 엘리아데가 통과의례적인 시련과 시험의 연속이라 했던 미로를 통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아주 조금씩 자신을 창조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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