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의 시련)3차시_에세이_강창원_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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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북촌 작성일26-03-18 17:51 조회23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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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원_2026 종교인류학_미로의 시련_3주차_에세이_031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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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방법
신석기인의 자기발견
신석기인으로 씌여 있지만, 그들이 족보(?)도 없이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기에 후기 구석기인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구전되어 내려온 사냥 기술과 열매 채집, 어로만으로는 커져가는 씨족의 건강과 안정적인 식생활을 도모할 수 없었다. 때로는 ‘압박감’이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뜻밖의 결과를 낳는 법. 씨족생존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은 절박함으로 바뀌고, 절박함은 인류의 인지능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 자연상태에서 자라는 식용 곡물의 1년 생태주기를 꼼꼼히 관찰하여, ‘농경’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기나 긴 씨족내 대토론을 마치고 무리는 이윽고 유랑의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 드디어 인류는 한 곳에 정착하여 밀과 벼와 같은 곡물의 씨앗을 뿌리고 물어 대어 재배하는 농경사회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인류는 농경 정착이 지속되면서 땅을 일구거나 수확 혹은 저장하기 위한 도구들을 만들어 낸다. 인류 문명사회의 원점인 농경의 역사는 그렇게 본격화된다. 자연 질서에 ‘순응’하기만 하던 구석기 방식의 삶은 자취를 서서히 감추고, 자연의 ‘생명력’을 인간이 활용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적정한 곡물의 생육조건을 알게 된다. 그러던 중, 문득 식물의 재생순환–태어나 자라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의 구조를 인간의 삶에 자연스럽게 연결 짓게 된다.
그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삶이 죽음으로 종결되면 존재가 무효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다시 태어남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순환고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냥과 채집만으로 생계를 어어 왔던 구석기의 직선적 역사관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논리체계 였다. 이 무렵 ‘똘똘한’ 신석기인 몇몇이 당연하게 느껴지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동물과 식물에게, 우리 인간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끝없이 순환하게 힘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존재의근원을 찾고 싶었던 신석기인은 목적지 없는 영적 탐험을 떠난다. 무리와 떨어져 동굴에서 홀로 지내기도 하고, 모두가 잠든 새벽 홀로 깨어 기도하기도 한다. 천신만고 끝에 ‘신비한’ 식물을 구해 먹기도 하고, 며칠 동안 끼니를 굶으며 맑은 정신상태를 유지하려 애쓰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굴에서 기도생활을 이어가던 어떤 이가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어떤 존재를 만나게 된다. 특별한 경험이 있었던 그날 이후 그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고, ‘샤먼’이라 불리게 되었다.
성례를 통한 새로운 인간정신의 창조
‘인간이 순환의 관념, 태어나 살고 죽고 재생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우주적 순환주기에 통합 시킴으로써 그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농경 덕분이었어요. 처음으로 인간의 상황을 꽃이나 식물의 생명에 비교한 것이 신석기 사람이었죠.’ (『미로의 시련』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북코리아, 97쪽). 무의미함에서 벗어나 실재(實在)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오랜 열망의 표현이 종교가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당연히, 구석기인이나 신석기도 예외가 아니다.
엘리아데는 역사의 뒤안길에 감춰져 있던 신석기인에게서 ‘문명의 근본적 통일성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고, ‘인간의 운명과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특정한 존재 양태’-종교인류–를 보았다. 인간은 시간을 따라 그저 흘러가며 ‘살아지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근원’을 향한 삶을 살고자 하는 적극적 존재임을 역사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존재에 대한 실재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유럽이라는 좁은 시야를 벗어나 인도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인도에서 머문 3년 동안의 배움과 경험은 그의 학문과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한편, 실재에 대한 인류의 경험적 열망은 다양한 종교적 의례와 성례로 발전한다. 엘리아데는 성례에 의해 삶이 변화할 수 있음을 인도에서 직접 목격하며 ‘삶이 성례적인 체험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그게 첫번째 발견이었습니다····· 그 테크닉에 의해, 또 다른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서도 삶을 재성화하고, 자연을 재성화할 수 있’다고 밝힌다.
또한, ‘모든 인간실존이 연속되는 통과의례적인 시련과 시험의 연속이기도 하죠. 인간은 무의식적 이거나 의식적인 일련의 통과 의례에 의해 그 자신을 창조해 가는 것입니다.’ (같은 책, 52-53쪽)에서 알 수 있듯 통과의례를 의해 재성화된 삶은 이전의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이끌며,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현대인에게 권하는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방법
‘역사적 공포’는 민족 혹은 국가에 들이닥친 고난과 역경에서 그 사건과 시련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생기는 극단적 형태의 감정이다. 이런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할 경우 부정적 집단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역사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엘리아데는 민족이나 국가적 상황으로 역사의 공포를 이야기하지만 개인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 현대인은 ‘역사적 공포’가 만성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 하다. 개인에게 끊임없는 성과향상이 요구되고, 업무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책임 또한 개인이 떠안아야 한다.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타인과 비교되기에 과도한 피로에 시달리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진되어 있는 개인에게 삶의 위기와 시련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며 살아갈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성찰적 시간이 절실한 이에게 주어지는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카톡 업무 메시지이다.
현대인이 엘리아데가 말하는 통과의례에 진정성을 느껴 실천하려 해도 이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듯 하다. 하지만, 그는 감사하게도 현대인이 어떻게 영적 삶에 다가 설 수 있는지 뒷문을 열어 두었다. ‘내 자신은 근대 세계의 산물인 우리들은 문화를 통해서만 온전한 계시를 수용하도록 ‘선고 받았다’고 믿어요 ····· 우리는 책을 통해서 영적인 삶을 배우고 깨닫도록 선고 받았어요. 근대 유럽에서는 더 이상 구전교육의 전통이나 민속적인 창조성이 없어요.’ (같은 책, 103-104쪽).
하지만, ‘책’은 깨달음이 완성이 되는 곳이 아니라 시작하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미로 같은 삶의 현장 속에서 길을 찾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여행의 종착지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율리시스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다시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분명히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미로 안에서는, 이동할 때마다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어요. 그 미로에서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책, 156-157쪽).
길은 떠나는 자에게만 펼쳐지므로 목적지까지 ‘애써’ 걷지 않고서 이 길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할 도리는 없다. 그렇기에 오늘도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물론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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