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몫] (수정판) 부(富)의 두 사용, 살해와 증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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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oolyule 작성일25-11-19 10:45 조회3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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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판] 종교 인류학 『저주받은 몫』 20251118 김유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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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저주받은 몫』 20251119 김유리
부(富)의 두 사용, 살해와 증여
조르주 바타유는 경제란 생산성만으로 ‘제한’되지 않고 비생산성을 포괄하는 ‘일반’ 운동이라고 한다. 생산 중심의 현대적 관점의 대척점에 놓여있는 순수 소비, 즉 낭비적 경제를 아즈텍과 북서아메리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르주 바타유의 ‘일반 경제’ 개념에 따르면, 잉여는 경제 발전과 성장을 위해 재투자될 수 있지만 한계가 있다. 성장의 한계 지점에서 잉여를 무용하게 소진/소모하는 행위가 일관되게 나타난다고 한다. 생산에 종속되지 않는 소비인 소모와 탕진이 “근본적 비생산의 영역”으로서 보다 포괄적인 일반적 경제 운동의 한 축을 구성한다.
아즈텍인들의 희생제의와 전쟁
아즈텍인들은 “도덕적으로 우리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아즈텍인들의 세계관은, 현재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세계관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방식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생산”이 우리의 사유에서 차지하는 위치만큼 아즈텍인들의 사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소진/소모”이다. 우리가 “노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만큼 그들은 “희생”에 주의를 기울였다.
아즈텍인의 신화에 따르면 인간이 창조된 이유는 태양을 먹일 심장과 피를 지닌 이들을 있게 하기 위함이다. 동식물이 인간을 먹이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태양의 먹이로 창조되었다는 신화다. 이러한 믿음은 생산보다는 소진/소모에 부여된 “극단적 가치”를 의미한다.
아즈텍 사회를 활성화했던 폭력의 운동은 외부와 내부를 모두 향한 것이다. 포로들의 제의적 희생은 그 포로들을 잡기 위해 전장에 나가는 전사들의 희생 또한 명령한다. 아즈텍의 주기적 인신공희의 제물이 된 포로와 포로를 잡으러 나간 전투에서 전사한 아즈텍 전사들이 제단과 전장에서 태양과 대지의 식탁에 오른다. 아즈텍 전사들을 위한 기도에서 신은 전사들이 전투 중 죽을 것을 바라며 그들이 세상에 보내진 이유는 그들의 피와 살로 “태양과 대지를 먹이고자 하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피와 살을 먹고 마셔 충족된 태양은 희생 제물들에게 영광을 내린다고 하며, 전사들은 “죽음에서 매혹과 즐거움을 해”달라고 기도한다.
기묘한 신화들과 잔혹한 제의 속에서 아즈텍인들이 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바타유는 희생제의가 “사물”을 내재적 질서 속으로 돌려보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인류는 내재적 질서에서 유용성을 목적으로 한 세계로 뜯겨 나오는 일인 “사물화”를 “타락”으로 보았다. 바타유는 모든 시대의 인간이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타락이라고 하면서, 아즈텍인 역시 잃어버린 내재성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고 한다.
종교란 “잃어버린 내재성을 찾으려는 오랜 노력이자 불안에 찬 탐색”이다. 인간은 내재성을 상실하고 빈곤해진 상태로부터 진정한 부를 되찾기를 바란다. 희생제의는, 동물과 식물이 오직 인간만을 위해서만 가치가 있고 그 스스로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듯이 ‘노예적으로 사용’되던 상태에서 동식물을 내재적 세계의 질서로 되돌린다. 희생을 바치는 인간도 이러한 희생제의를 통해서 성스러운 소통을 이루고 내적 자유로 돌아간다고 한다. 심오한 자유란 파괴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희생제의를 통해 제물과 함께 내재성에 참여한다고 해도 살해된 자와 살해자가 같을 수는 없다. 바타유는 파괴란 반드시 죽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사물인 한에서의 파괴”를 말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물성 파괴는 인간과 동식물 사이의 “유용성의 관계를 부정”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면서 말이다. 이때 파괴의 본질은 “유용한 작업의 속박에 묶인 것을 아무런 이득 없이 그저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노예적 사용의 파괴로 발생하는 효과는 노예와 주인의 분리의 종료이다. “내재적 참여”란 분리 불가능의 상태를 뜻한다. “모든 인간들은, 내재적으로, 그저 단 하나일 뿐이다(97쪽 원주).”라는 말처럼 내재성의 세계에서 인간은 그가 노예적으로 사용해온 동식물과 하나의 일반 경제를 구성한다. 하지만 인간이 사물 상태에서 벗어나 동식물과 경계를 상실한다는 것은 광기가 아닐까? 내재성의 회복은 광란의 모습으로 표출된다. 그러한 광란, 도취, 무절제에 대해 “타락”이라고 할 것 같은데, 바타유의 일반 경제의 관점에서는 유용성의 세계에만 속해 있는 것을 “타락”이라고 말하며 이성이 유용성에 종속된 상태를 지적하니 혼란스럽다.
희생제의는 노예적 사용이 속되게 만들어 타락시킨 것을 다시 성스러운 세계로 돌려놓는다. 노예는 주인과 가장 깊은 심부에서는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고 내재적 참여 관계에 있다가 하나의 사물로 “타락”했던 것이다. 희생제의 이후 포로는 희생되고 전사는 살아있는데 어째서 전사가 포로와 함께 참여했다고 할 수 있을까? 바타유는 노예적 사용을 진정으로 벗어나는 것은 제물뿐이며, 희생을 바치는 자는 여전히 사물화하는 세계 속에 머무른다고 한다.
희생시키는 자는 축제 동안에만 신성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에게 미래는 여전히 남겨져 있다. 미래는 그를 짓누르는 사물의 무게이다. “주체”는 미래를 염려할 때 곧바로 “대상에 종속”된다. 주체가 미래를 더 이상 염려하지 않을 때 그가 ‘저지르는’ 무용한 소진/소모는 주체를 “즐겁게 한다.” 무절제한 소진과 소모는 내재적 주체를 표출하는데 이것으로 인해 분리된 존재들이 서로 소통하는 길이 열린다. 희생제의, 축제, 과시적 낭비는 “강렬한 소진/소모의 주체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이며, 마치 화덕 속에 들어가듯 열기를 뿜어내며 끓어오르는 에너지 속에서 일어난다.
인간을 사물로 전락시키는 사회적 삶의 측면은 노예제가 사라진 현재에도 여전히 있다. 현재는 노동이 인간의 내재성을 “대체”한다고 한다. 노동은 결과만이 중요하게 여기는 “합리적 속박”으로 “인간 욕망의 깊이와 자유로운 분출”을 대체한다. 바타유의 역사론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노동은 “사물들의 세계”의 기초가 되었다. 이어서 고대인들은 타락한 속된 세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다시 인간은 잃어버린 내재성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아즈텍에서는 신화에서 희생을 높이 평가하고(인신공희), 신들에 의한 소진과 소모를 전사의 영예로 찬양하며(전쟁), 신성에 소진과 소모의 의미를 부여했다(종교와 경제). 살해로 정점에 이르는 아즈텍의 인신공희와 전쟁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바타유는 인신공희의 진정한 정점은 곧 살해될 포로가 자신을 잊고 살해자들과 함께 춤추며 즐기는 장면이라고 했다. 축제의 “엄청난 혼돈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희생제물이 소멸되는 순간이라고 한다. 노동으로 살아가는 자기를 잃어버릴 정도의 엄청난 쾌락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축제적 순간이 현대에는 어떤 양식들로 개발되고 있을지, 의구심을 느끼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경쟁적 증여: 포틀래치
최초의 교환은 획득의 요구가 아니라 소멸시키고 낭비하려는 요구에 응답한다. 아즈텍의 상인들은 이익에만 기반한 거래가 아니라, 가격 흥정 없이 증여를 함으로써 부를 얻었다. 증여를 통한 교환은 현재의 상업적 활동과 대척점에 놓여있다. 북서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와의 비교를 통해 증여의 형식을 더 살펴볼 수 있다.
포틀래치는 부의 순환 형식이지만 가격 흥정을 배제한다. 포틀래치는 막대한 부를 장엄하게 증여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증여는 경쟁자에게 도전이 되고 증여의 수혜자는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포틀래치로 더욱 후하게 도전에 응수한다. 과시적 낭비는 증여만이 아니라 파괴를 통해서도 이루어졌고 이러한 파괴 행위는 희생제의와 거의 동일한 의미다.
포틀래치는 다른 이를 위한 소비다. 다른 사람 앞에서 증여와 파괴를 행함으로써 그럴 권력을 가진 것을 과시한다. 이는 부의 사용을 통해 부유해지는 것이다. 또한, 증여는 증여의 권력을 구성한다. 증여는 권력을 획득하는 일이 된다. 이와 같이, 부를 포기함으로써 더욱 부유해지고, 권력을 포기함으로써 권력을 얻는 역설은 과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증여는 일반경제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증여하는 자는 겉으로만 잃는다. 증여하는 일은 상실로 보이지만 부는 상실을 행한 자에게 되돌아간다. 증여는 증여의 수혜자의 갚을 의무를 발생시킨다. 도전에 응하는 사람은 더욱 후한 증여를 통해 승리감을 느낀다. 되돌려 받은 자는 이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바타유는 포틀래치가 증여한 자에게 주는 것은 ‘서열’이라고 말한다. 서열이 높은 자의 특권, 영광, 서열은 ‘능력’과는 다르다. 영광은 타자의 자리를 뺏거나 재산을 가로채는 전쟁 능력에서 오지 않는다. 영광이란 전투의 열정이 전제하는 비상식적 격정과 무절제한 에너지 소비라는 운동을 표현한다. 전투가 어느 순간에 계산을 벗어나 있게 된다는 점에서만 전투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전쟁의 영광은 생명 자원의 막대한 소비를 통한 서열의 획득과 연결된다.
포틀래치는 증여자에게 재화의 ‘소유’와 정반대의 의미를 띠지만, 획득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기도 한다. 이렇게 포틀래치는 “근본적인 양가성”을 띤다. (1)과잉 자원을 소모/소진하기 위해 탕진하는데, 이것은 곧 탕진을 소유하는 일이 된다. (2)탕진은 탕진하는 자에게 특권을 주며, 이 특권은 일종의 재화로서 획득되어 서열을 결정한다. (3)개인의 서열은 전유된다. 서열은 이득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 이득에 못지않게 자원의 탕진에 의해 서열이 결정된다.
양가성에 빠진 인간 존재
자원을 낭비하면서, 자원 낭비조차 활용하는 인간은 양가성에 빠진다. 인간 존재는 재화를 노예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부정하지만, 그러한 부정에 “가치와 특권과 진실”을 부여함으로써 다시 노예적 사용으로 돌아간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유용하고 포착 가능한 사물로부터 성장(지속)에 도움이 되는 필수적인 것을 식별해낸다(속된 인간의 부). ‘유용한 사물’이 인간 자신의 소망에 더 이상 부응하지 않게 되는 한계 지점이 오면, 이때부터 인간 존재는 포착 불가능한 것을 붙잡으려고 한다(종교 인간의 성스러운 서열). 포착 불가능한 것을 포착하려는 행위는 재화의 무용한 사용으로 표출된다(바타유는 이것을 “놀이”라고 명명). 인간은 포착 불가능한 것을 포착하고자 하며 무용한 것조차 유용하게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는 오른손이 준 것을 왼손이 ‘고통스럽게’ 되찾으려고 하는 존재다.
부자의 빈곤함 vs. 누더기의 화려함
이해관계란 살아 있는 생명 전체로부터 떨어져나온 존재들(집단들)의 삶의 요구다. 이 존재들은 미래를 염려하며 이해관계를 계산한다. 그러나 생명의 일반적 운동은 개체의 요구를 넘어서 실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주의는 결국은 기만당한다. 강자는 약자의 몫을 강탈하고 착취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이익이 비이성의 영역으로 돌아가고 부자들의 거짓말이 진실로 변하는 곳”에서는, 전체적인 결과를 바꿀 수 없다. 다시 말해, 성장과 획득의 가능성은 한계 지점을 갖기 때문에, 고립되고 경쟁하는 모든 존재가 욕구하는 바인 “에너지는 필연적으로 해방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부자들은) 이러한 해방을 이익에 관계 짓고자 반복해서 거짓말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자원의 개인적 축적은 원칙상 파괴에 바쳐진다.
축적하는 개인들은 이러한 부와 서열을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한다. 부는 마치 식량의 저장과 유사한 것이다. 부는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파괴되는(썩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열이 높은 부자는 ‘곧 폭파될 개인’이다. 폭발을 회피하기 위해 그는 부와 권력이 없는 것처럼 빈곤을 가장한다. 부자의 거짓말은 더 잘 착취하고 파렴치하게 이득을 얻어낼 수 있는 원천이 된다. 이러한 부자의 빈곤함도 넘침/과잉의 운동을 방해하지 못한다. 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천천히 또는 갑작스럽게, 부의 운동은 에너지 자원을 누출시키고 소진/소모한다.”
현재의 사회에서 부에 대한 진리는 비참한 빈곤으로서만 표현된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사치와 심오한 포틀래치는 부의 경멸과 파괴를 행하는 빈곤한 이들에게 귀속된다. 진정한 사치는 부의 완전한 멸시를 요구한다. 노동을 거부하고 자원을 ‘화려하게’ 파괴하며 부자의 인색함과 기만에 경멸과 무관심을 보낸다. “누더기의 화려함과 무관심”만이, 넘치는 과잉은 축적이 아닌 파괴의 대상이라는 부의 진리를 담지한다. ‘거짓말하는 부’는 “생명의 넘침”을, ‘유용성의 기존 질서’에 ‘반항’하는 측으로 넘긴다.
포틀래치와 희생제의의 차이
포틀래치에서 증여는 부의 파괴를 규칙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부의 전체가 “보존”된다. 포틀래치는 무용한 소비가 아니라, “생산적 소비의 제도를 보완”하는 형식이다. 희생제의가 유용한 생산물들을 순환에서 분리시키는 반면, 포틀래치의 증여는 애초부터 무용한 대상들을 동원한다. 고대의 사치 산업이 포틀래치의 기초이다. 증여는 사치/과잉의 표현이고 형식이다. 사치와 과잉은 서열을 만들어낸다. 호화로운 사치품을 내놓아 높은 서열에 오르는 것은 인색하고 계산적인 사용이다. 이것은 부를 자신의 빈곤으로 바꾸는 행위다. 이에 비해 희생제의는 생명 전체가 넘침/과잉의 진리로 귀환하는 것이다. 넘침/과잉의 진리는 부의 형태는 언젠가는 붕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스스로 부를 확보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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