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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사상사 2] 3학기 에세이 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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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헤미안 작성일25-10-01 18:07 조회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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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서 구원으로

 

  

고통은 극복해야만 하는 것일까?

 

사십대 이후부터 내 삶의 언저리에는 늘 불교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공부 공동체감이당에 접속하여 불교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고 있다. 그동안 배운 바에 따르면 불교에서는 태어나고 죽는 일련의 과정 모두가 고()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혜를 통한 통찰과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했다. 그러하기에 고통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나는 늘 고통의 원인과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인해 삶의 과정에서 맞이하게 되는 고통이 과연 피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얼마 전 TV에서 53년 동안 지리산 지게꾼 생활을 해온 분을 보았다. 전문 산악인들조차 오르기 힘든 천왕봉을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에 세 차례씩 등반하는 건 무지 힘든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게꾼의 무릎에는 굳은살이 여러 층으로 두텁게 박혀 있었다. 짐을 진 몸으로 잠시 쉬기 위해서는 한 쪽 무릎을 땅바닥에 꿇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쁜 숨을 헉헉 내쉬며 산을 올라가는 지게꾼이 고통스럽다기보다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나는 그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다른 편한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굳이 힘든 직업을 고수하는지, 나에게는 그렇게 고통스러워 보이는 일을 그는 어떻게 평온한 모습으로 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 일이 주는 금전적인 보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하지 말고 그 일만 고수하라는 외부적인 압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떤 일이든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평범한 진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한 학기동안 인문공간 세종에서 공부했던 세계종교사상사2(미르치아 엘리아데, 이학사, 2022)를 관통하는 주제가 떠올랐다.

세계종교사상사2의 주제는 종교사에서 구원이 갖는 의미에 관해서였고 구원의 문제는 고통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지리산 지게꾼을 보는 동안 의도적으로 몸을 괴롭히는 고행을 하는 고행자들이 함께 오버랩 되었다. 고대 인도의 고행자들에게 고통은 어떤 의미였을까?

  

고통이 고행이 되려면

  

일반적인 의미에서 고통은 크게 정신적·심리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으로 나눌 수 있다. 정신적 고통은 욕망의 좌절, 상실에 대한 슬픔과 우울 등으로 마음의 흐름이 자연스런 우주의 리듬에서 벗어났을 때 겪게 되는 괴로움이다. 따라서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통찰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감에 따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에 반해 육체적 고통은 물리적 통증을 유발한다.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사고로 인한 신체의 훼손 또는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픈 곳을 치료하여 원상태에 가깝게 신체를 회복시켜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며 현재의 상태에서 구원받기를 갈구한다. 왜냐하면 고통 받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존재의 한계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해서 인도의 사상서 우파니샤드에서는 모든 것은 고통이다라고 간명하게 정의하였다. 인간의 몸이 고통의 자리이므로 몸으로 경험하는 것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고도 하였다. 하지만 우파니샤드에서 고통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물이나 인간, 신이 갖는 한계성은 모두 같았다. 하지만 다른 존재들과 달리 인간만이 고통의 상태를 극복할 수 있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방법을 안다면 고통 자체가 끝이 아닐 수 있기에 인간 존재가 가지는 위치성이 중요했다. 이 부분에서 구원과 연결되어 고행의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고행이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서 행하는 것이었다. 단지 힘듦을 겪는 것, 괴로운 것, 한시바삐 벗어나야 하는 것으로 고통이 인식될 때 우리는 마냥 괴롭기만 할 뿐이다. 그것과 달리 고행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의 계시는 해방의 조건이 될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엘리아데는 그것을 다른 말로 구원, 인간적 조건의 폐기, 초월, 자유, 해탈 등으로 표현하였다(같은 책, p67). 인도에서는 모든 철학과 명상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중 상키야 학파와 요가학파를 중심으로 고통과 고행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인도 사상에서 고통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

  

인도 사상의 핵심은 최고의 실재인 브라흐만이 마야(무지, 환상, )에 의해 가려짐으로써 개별적으로 존재하게 된 아트만을 다시 브라흐만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원초적 실재인 프라크르티에서 나온 붓디(지성)는 현상과 인식적 관계만 유지하는 심리-정신적 작용일 뿐 정신 자체는 아니었다. 자유로운 정신으로 실재하는 초월적 실재(푸루샤)와는 어떤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통의 원인은 바로 이러한 심리-정신적 작용(프라크르티에서 나온 지성)과 정신(푸루샤)을 혼동하는 무지에서 비롯하였다. 인도사상에서 고통의 극복은 바로 이러한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과 직결되었다(같은 책, p73,76 요약).

상키야 학파에서 구원(해탈)은 정신(푸루샤)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었다. 인식은 계시에 의해 얻어질 수 있었고, 계시의 전 단계로 작용했던 지성은 자기 계시가 실현되자마자 정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실체 중에 재흡수 되었다. 그러한 상태를 생명 속에서 해탈한 상태라고 했는데, 해탈을 했음에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카르마의 찌꺼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같은 책 p83). 완전히 해탈하는 순간은 죽음을 맞이하여 정신이 육체를 떠날 때였다. 따라서 육체로부터 정신을 분리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상키야 학파에서 고통으로부터 구원되는 첫 걸음은 올바른 인식이었다.

고전 요가학파에서 요가의 목표는 명상과 고행에 의해 의식의 정지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요가 명상의 출발점은 단일한 대상(에카그라타)에 의식을 집중시켜 심리적 흐름을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활동과 잠재의식의 활동 모두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요가의 기법으로 야마(yama :억제), 니야마(niyama :훈련), 아사나(asana :요가 자세), 프라나야마(pranayama :호흡조절), 프라티야하라(pratyahara :감각활동에서 해방), 다라냐(dharana :집중), 디야나(dyhana :명상) 등이 있었는데 그 중 아사나에서 의식의 상태를 억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무런 노력 없이 몸의 자세를 단 하나의 움직이지 않는 성스러운 자세로 환원시켜 육체의 운동성과 유동성을 멈추게 함으로써(정지) 가능했다. 요가에서는 무지를 인식하고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의식 상태를 정지시킬 수 없다고 보았기에 잠재의식과 의식의 순환을 단절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한 단절은 아사나 과정에서 육체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어야 가능했다. 의식의 상태를 정지하는 것은 곧 인간적 조건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요가 수행자가 삼마디(samadhi :자기 몰입상태, 내부로의 흡수, 집중)에 이르면 인식에서 상태로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삼마디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프라크리티의 지배로부터 푸루샤의 해방이 실현될 수 있었다. 지성은 푸루샤로부터 이탈해 프라크리티 속으로 재통합 되었고 수행자는 해탈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지반무크타(살아있는 상태에서 해탈한 자)였으며 더 이상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정지해 있는 현재 속에서 살아간다(같은 책 p99). 이러한 정신의 존재양식은 의식에 있어서 대상의 완전한 결여, 완전한 공()이 된 자기 몰입 상태를 의미했기에 엘리아데는 이를 경험이 아닌 계시라고 불렀다.(같은 책, p99)

  

고통과 직면하기

  

고통이 해방의 조건이 될 수 있을 때 그것은 고행이 될 수 있다. 고통의 원인을 찾아가는데 몰두했던 상키야 철학에서는 고통을 명상하여 무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했다. 요가학파에서는 요가기법을 통해 고통을 조절할 수 있어야 했다. 조절을 너무 세게 하면 고통이 더 커지고 약하게 하면 의식을 억제할 수 있는 상태로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따라서 요가 수행에서는 고통을 조절하여 삼마디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다양한 요가기법들이 동원되었다.

인식하고 조절해야 하는 것 중 어떤 것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는 구원(해탈)이 있었다. 인식하고 조절하지 않아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올바르게 인식하고 고통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고통 속에만 머물면 고통의 원인도, 목적도, 결과도 모른 채 그저 괴롭기만 할 뿐이었다.

지리산 지게꾼의 삶이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의 삶 자체가 나에게 고행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쩌면 자기 고통에 대해 명상하면서 산을 오르는 고통이 곧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멈추지도 서둘지도 않고 묵묵히 한걸음씩 내딛을 뿐, 힘들면 잠시 쉬어가더라도 결코 중단하지는 않는 그의 행보 속에서 그는 스스로 고통을 조절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53년 동안 지고 가는 짐의 무게도 줄어들었고, 한걸음씩 내딛는 보폭이나 속도는 달라졌을지언정 그는 여전히 고통과 마주하고 있었다. 마치 고대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이 정지된 자세 하나에 몰입하여 인간 조건을 초월했듯이, 그 역시 산을 오르는 동안 우주와 신체가 변환되는 경험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통이 고행이 될 수 있는 변환점이 우리들 각자의 일상에서도 스쳐가고 있을지 모른다. 편리함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함으로 통하는 현대인들에게 일상에서 겪어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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