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종교사상사2] 3강 후기_고통의 구제 방법-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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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임 작성일25-08-18 11:08 조회45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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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사상사2 3강 후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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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5-08-18 1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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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구제 방법 – 연결
(17장 요가의 기법, 18장 붓다의 시대, 19장 붓다의 메시지)
지난 시간 브라만교의 상키아 철학의 푸르샤와 프라크리티를 이해하느라 남겨놓은 요가 부분으로 3강 수업을 시작했다.
축의 시대: 화두의 변화
BC 550년 축의 시대(넓게는 BC900~BC200년)에 세계적으로 화두가 바뀐다. 우주는 어떻게 창조되었고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궁금해하던 인류가 나는 왜 이렇게 힘든지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자기(self)’에 대한 개념이 강력하게 대두되면서 시대의 화두가 ‘구원론’으로 바뀌고 있다. 달님은 이 시기에 고통의 현장인 몸과 구원과 신에 대한 개념들이 어떻게 바뀌고 형성되는지를 설명했다.
*몸에 대한 관점 - 죄의 자리, 원죄(유대교)/신체의 극단적 폄하(이슬람교)/신체에 대한 적극적 부정(요가학파)/지나친 고행 경계(붓다)
*구원救援(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줌)이 이루어지는 방식
–유대교: 메시아(구원자)가 이 고통을 끝내준다. 구원의 방향이 신으로부터 내려온다. 보편자에서 출발하여 개체로 내려온다. 인간은 구원을 받는 존재이다.
-불교: 붓다는 깨달아서 스스로를 구원했다. 그를 모범(模範)으로 따라함으로서 우리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개체에서 시작해서 보편적인 깨달음을 연다.
*신 개념의 변화
-요가학파: 무신론적 이원론인 상키아 학파를 이어받았지만 인격신 개념을 쓴다. 기존의 신 개념과는 다르게 엘리아데는 요가를 잘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 한다.
-불교: 붓다는 신이 아니다. 그러나 붓다가 깨달았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차원에서 신 개념을 쓴다.
이슬람교과 불교의 평등의 차이
현재 인도에서 이슬람교도는 12%를 차지 하지만 불교 신도는 0.9%에 지나지 않는다. 이슬람의 인도 정복이 가장 큰 원인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원인은 없는가? 이슬람교도 불교도 평등을 강조했다. 달님은 평등의 개념이 달랐다고 설명한다. 달님이 설명한 두 가지 평등은 하나의 척도 앞에서 평등한 것과 차이를 “잴 자가 없어서” 모두의 차이를 인정하여 평등한 것이다. 이를 두 종교에 대입해 보면 이슬람교는 하나의 척도로 평등한 것이고 불교는 차이를 잴 수 있는 자가 없어서 평등한 것이다. 단일한 척도로 재단하는 것은 쉽다. 대중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보다 선·악이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 척도 없이 차이를 보고 존중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렵다. 무아를 깨닫게 되면 차이를 담지하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다. 불교의 법을 깨닫기는 예나 지금이나 너무 어렵다. 그래서 복잡하고 어려운 불교보다 선명하고 쉬운 이슬람교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한다.
구제의 기법-8단계 요가
요가는 고행의 기법과 명상의 방법 둘 다를 가리키고 브라만교뿐만 아니라 불교, 자이나교 문헌에도 발견된다.피탄잘리는 요가학파의 이론적, 기술적 전통을 수집하여 『요가수트라』로 정리하였다. 요가학파는 상키아학파의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의 방법으로 요가을 제시한다. 고통이 일어나는 현장인 몸을 수행하여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달님은 세계 종교 가운데 몸을 조절하는 것으로 구원의 길은 조직한다는 것이 특별해 보이고, 우리의 몸이라는 조건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아쉬탕가 요가(8단계 요가)
1. 야마(억제, 계율), 2. 니야마(훈련, 권계) 3. 아사나(자세) 4. 프라나야마(호흡 조절) 5. 프라티야하라(외적 대상에 사로잡힌 감각 활동을 해방 시키기) 6. 다라냐(집중) 7. 디야나(명상) 8.사마디, 삼매(의식의 정지 상태)
억제라는 번역어가 걸렸다. 억압적이고 금욕적이고 강제적인 느낌을 풍기기 때문인 것 같다. 수행하는 초기 준비단계에서 계율을 지키기 위해 억제가 필요하긴 하다. 요가는 마음작용을 지멸하는 것이다.(Yoga’s citta-vrtti nirodhdh 『요가수트라』1장 2절) 마음작용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은 억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집중으로 가능하다. “요가 명상의 출발점은 단일한 대상, 에카그라타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육체적 차원에서 아사나는 하나의 점에 집중하는 에카그라타이며, 이때 몸도 하나의 자세로 ‘집중’된다.” 에카그라타의 훈련은 감각적인 활동과 잠재의식의 활동을 통제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것은 명석함의 상태이고 자신을 잊어버리는 망아(忘我)가 아니다. 엘리아데는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삼매를 엘리아데는 요가의 ‘엔스타시스’(샤머니즘의 망아의 체험인 엑스터시스에 대립하는 요가 특유의 체험)로 명명했다. 이는 사유가 대상의 형식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명상의 상태라고 한다. 인식에서 존재로의 역설적 전환인 “지평의 단절”이 발생한다. 우리는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알지 못하고, 경험한 사람들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표현되었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8단계 요가를 거처 최종적으로 해탈한 자를 푸루샤라 한다. 그는 시간 속에 사는 동시에 불사의 상태에 있다. 절대적 자유를 획득한 그는 다시 물질적인 개체적인 삶으로 다시 들어온다.
독화살에 맞은 사나이……
*불교의 우주론은 신개념이 없는 우주론이다. 우주는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를 계속하는 것, 즉 선하거나 악한 인간의 행위에 의해 끊임없이 창조되는 것이다.” 붓다는 모든 형태의 사변에 몰입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다. 우주가 영원한지, 영혼이 육체와 동일한지, 여래가 사후에 존재하는지와 같은 문제에 붓다는 침묵했다. 이에 불만을 표시하는 말룬키야퓨타에게 붓다는 독화살을 맞은 사내가 화살을 쏜 사람과 화살이 어떤 종류인지 등등을 알기 전에서 화살을 뽑을 수 없다고 하다가 죽는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마치 이러저러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성스러움에 이르는 길을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과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왜 붓다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토론을 거부한 걸일까? 왜냐하면 소용없기 때문이다. 말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지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에 소용이 없는가? 열반에 이르는 수행에 무용하다. 사변에 대한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서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상키아 학파는 푸르샤와 프라크리티의 미묘한 관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고, 기독교에서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의 뜻과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
* 축의 시대에 개인의 구원으로 화두가 바뀐 것은 고통을 개인적인 경험으로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통은 개인화된 사회를 말한다고 달님은 말한다. 그리고 개인과 개인의 연결이 단절되고 고립될수록 고통은 더 커진다. 자의식이 높을수록, 자아를 성취하기 위해 달려갈수록 고통은 더욱더 커진다. 무문자 사회에서의 인류는 호혜적인 관계로 공동체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도 우리가 느끼는 개인적인 고통이 있을지 궁금하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은 연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의존해서 존재한다. 우리가 연결되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자의식에서 나와 모든 것과 연결하고 연결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금강승(티벳 불교)에서는 타인을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보리심(菩提心)을 가르친다. 홀로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마음으로는 열반에 이를 수 없다. 보리심이 있어야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는 역설은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생각하게 한다. 남에게 이로운 것이 나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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