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종교사상사2] 25장 유대교의 시련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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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헤미안 작성일25-09-03 14:45 조회58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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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사상사2 25장 발제 /2025.9.3 박서영
25장 유대교의 시련: 묵시문학에서 토라의 찬미까지 (요약발제)
196~198
바빌론 유수가 끝날 무렵 씌여진 「제2이사야」에서 가장 투철하고 체계적인 유일신론과 종말론의 시작이 나타난다.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이 타락하여 유대왕국이 멸망하고 포로생활을 한 것은 신이 내린 결단이었고, 이제 처벌이 끝났으니 야훼가 계약을 갱신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계약은 영원한 구원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야훼에 의한 파괴, 유수에서의 해방, 시온으로 귀환한 야훼, 이스라엘 땅의 탈바꿈, 열방의 야훼에게로의 개종). 「제2이사야」는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종말론적 시나리오로써 이후 후대의 예언자들에 의해 반복하여 발전하게 된다. BC 538년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신전을 재건할 때 예언자 ‘학개’가 공사가 끝나는 날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의문을 삼는 일이 여러번 일어나면서 「제2이사야」가 예견한 세계의 변용은 지연되었고, 구원의 개념 바뀌면서 모든 종말론적 희망이 점차 사그라졌다.
예언자 ‘스가라’에 의하면 구시대가 야훼가 가진 파괴의지를 특징으로 하는 반면 신시대는 야훼가 가진 구원에 대한 열망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메시아의 통치가 예루살렘에서 펼쳐지고 열방이 야훼의 은혜를 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열방과 이스라엘, 선과 악, 가르기 시작) 이와 유사한 종말론적 예언들이 “이스라엘의 묵시문학” 문헌에서 확인되었고, 에덴의 이미지가 바빌론 유수 이전의 낙관적인 예언과 차이를 보이는 등 종말론적 변화가 나타났다. 다른 민족으로 종말론적 구원이 확대되어 보편적 구원 개념이 등장했지만 구원의 장소는 여전히 예루살렘이었다. 역사적인 세계에 관심을 보였던 예언들 외에 우주 전체에 관심을 보였다. 고대형태의 예언들도 있었다. 예언자 ‘학개’는 최후의 심판이 우주적 파국을 동반하여 야훼가 새 하늘과 새 땅 창조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창조의 갱신에도 낙원적 요소는 내포되어 있다.
(질문 : 파괴, 창조, 순환 --> 종말론 / 파괴하지 않고 순환하는 종교도 종말론인가?)
199
바빌론 유수 이전의 종말론적 예언에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변형과 새로운 실존의 질, 원초적인 인간의 완전성으로의 회귀, 우주의 갱신에 대한 열망 등 농경민들이 가지는 중심적 개념을 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새로운 시대에서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에 대한 갈망이 심화되면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실현될 영적인 완전성에 대한 기대는 포기하게 된다. 그 결과 종말 지연되면서 율법주의와 의례주의적 권위가 강화되었다.
민족의 정기가 재건되는 것은 율법(torah)의 절대적인 권위를 토대로 효과적인 공동체가 구성될 때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의례적인 순수함과 죄에 대한 공동의 속죄가 중요해짐에 따라 느헤미야, 에스라 등에 의한 이스라엘 개혁은 인종 간의 분리를 유도하였다. 구전 토라(Torah)의 사상 발전은 비의를 합법화하는 과정이었다. 에스라의 개혁 이후 수백년간(축의 시대) 다수의 예언서들 저술되었고, 많은 초기 문헌들 개작되었으며, 보편주의자와 민족주의자라는 상반된 두 종교적 경향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보편주의자들은 종말론적인 예언자들의 희망을 계속 간직하였던 반면, 민족주의자들은 계시의 유일성 선포하였다. 이스라엘의 인종적인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결국 두 집단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200~201
BC4 헤레니즘과 대면한 이후 유대교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귀족들과 일부 부유층들이 헬레니즘적 사상과 제도를 도입하려는 개방적이고 세계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던 반면 보수적인 종교집단과 농촌 주민들은 그러한 경향을 거부했다. 당시의 가장 독창적인 종교적 창조물로 ‘지
혜의 인격화’(호크마, 유대교 신비주의 카빌라, 신-우주-인간의 영혼과의 관계 나타내는 세피로트 나무, ‘지혜’는 신의 속성)를 들 수 있는데, 그것을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보는 입장과 셈족 계통의 문헌에서 추론하는 입장 등이 있다. 어쨌든 지혜에 대한 상반된 해석과 재평가는 유대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증언으로 이루어진 「전도서」에서는 하느님의 행위가 설명 가능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사람이나 금수나 모두 동일한 운명에 놓여있다고 했다. 전도서에 따르면 어디에도 악이 존재하기에 결국 더 이상 하느님의 “정의”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창조의 의미와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바빌론 유수 이후 헬레니즘 문화가 유대교에 끼친 영향이 전도서에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전도서의 저자는 하느님의 실재와 전능함을 선포하여 인간은 그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반복하여 설파했다. 「집회서」(「벤 시라의 지혜」)에서는 「잠언」과 「시편」에서 의로운 사람을 우주 질서와 도덕적인 삶의 신성한 근원을 인식했던 현자로 해석했던 것을 거부하였다. 대신 ‘지혜’를 신앙 및 의례, 토라와 동일시하면서 ‘지혜’는 율법의 완성에 의해 구현된다고 보았다(“지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에만 부여한 유일한 산물이다”라고). 24장에서 지혜는 “온 세상과 자연, 그리고 (유대인만이 아닌)인류에 가득 찬 힘”으로서 현존한다고 선언했을지라도 벤 시라는 지혜의 보편주의적인 차원을 제한해야 했다. 이처럼 헬레니즘 및 소피아에 맞선 투쟁에서 유대의 종교를 형성하는데 호크마가 갖는 중요성은 컸다.
202
헬레니즘 국가 중 하나인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쿠스 4세 때 친그리스파들이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여 왕에게 토라를 폐기하도록 권유하면서 신전이 혼합주의적인 신전으로 변해갔다. 야훼를 제우스와 비교하는 것은 스토아적 철학에 매료된 친그리스적 지식인들에게는 수용될 수 있었지만 다수의 이스라엘들은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안티오쿠스 4세의 침략과 폼페이우스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는 과정, 그리고 강제적인 이교화로의 시도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헬레니즘 문화를 그들의 것과 구분 짓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시기의 종교적인 창조물로는 경건주의자들에 의해 탄생한 최초의 묵시문학(「다니엘」과 「에녹」)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엄격하고 폐쇄적인 공동체를 구성하였고, 율법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과 참회 의무를 강조하였다. 이 시기의 심판론에 의해 보편적인 역사를 구성하는 사건들은 더 이상 영원한 우주의 순환의 리듬을 반영하지 않았고 별에도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들은 오직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전개될 뿐이었다(목적론적, 단선적, 익숙한 종말론). 종말론적 사명을 지닌 최초의 인간에 대한 관념 역시 성서가 아닌 후대의 유대교에서 나타났다. 이전에는 악이 야훼의 적대자로 명확하게 구체화되지 않지만, 묵시문학에서는 세계와 역사가 악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완전히 분리). 아마 사탄은 야훼의 원초적인 이미지가 “분열”된 결과인 동시에 이란의 이원론적 교리(쿰란 문헌,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두 영혼, 선한 영과 악한 영)로부터 영향받은 결과인 듯하다고 엘리아데는 언급한다.
203~204
보편적인 선교에 대한 의식은 민족적인 경향 옆에서 자유롭게 발전할 수 없었다(헤겔, “기독론은 역사 속에 드러난 자유롭고도 독립적인 계시의 표현으로서 토라의 존재론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민족적이거나 혹은 역사적으로 한정된 조건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토라의 불변성과 율법주의의 승리는 모두 종말에의 희망을 끝내버렸고 묵시문학조차 점차 소멸하여, 유대 신비주의로 대치되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세계 선교를 포기하는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호를 위해 필요했던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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