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작가 비교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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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동엽 작성일25-05-13 22:42 조회52회 댓글0건본문
수성/ 비극 비교 글쓰기/ 25.5.14/ 이동엽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비교
두 가지 비극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에 대해 짧게 다룬 반면(오늘날 단행본 기준으로 챕터 하나 분량) 니체는 같은 주제로 『비극의 탄생』이라는 책 한 권을 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마치 한 어류학자가 물고기를 해부하듯이 건조하게 다룬다. 반면에 니체는 비극을 자신의 외동아들처럼 보호하려는 감정적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나는 이러한 차이가 철학자와 예술가의 차이를 보여주는 그것으로 생각한다. 철학자는 한 발 떨어진 제삼자의 처지에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사유하여 보편적인 법칙을 찾아낸다. 반면에 예술가는 미지의 영역인 신비로운 세계를 인정하면서 생명의 근본적인 충동에 몸을 맡기며 춤과 노래로 이를 표현한다. 철학자는 대상을 파고 들어가면서 해체하고 분석하지만, 예술가는 근원적인 충동을 느끼고 이를 발산한다. 즉 대상과 일체가 된다.
이러한 차이는 비극론에서 차이로 연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고귀한 인물이 한 행동의 재현(모방)이라고 하면서 비극의 구성요소로 6가지(플롯, 성격, 조사, 사상, 볼거리, 노래)를 제시한다. 그중에서 플롯(사건의 짜임새)이 개연성과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반면에 니체는 예술에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두 가지 충동이 있는데 마치 음전하와 양전하가 만나 전기를 발생시키듯이 두 가지 충동이 충돌하면서 예술이 발전한다고 본다. “아폴론은 태양과 지혜의 신으로서 조형 예술과 꿈의 가상을 상징한다면 디오니소스는 술과 황홀경의 신으로 음악과 도취의 세계를 상징한다”(『비극의 탄생』, 아카넷 박찬국 역, 48p) 니체는 그리스 비극은 이 양 충동이 조화를 이룬 것이지만 그 본질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음악과 합창단(코로스)이 비극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관객들로 하여금 망아(忘我)의 도취상태를 이끌어내는 것이 비극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상반된 평가의 원인
이러한 평가 기준의 차이는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평가에 대한 차이로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리피데스를 여러 가지 결함이 있지만 그래도 가장 비극적 작가라고 평가한 반면 니체는 에우리피데스가 신성을 모독하고 지성이라는 폭력으로 신들을 죽였고 그로 인해 그리스 비극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고 비판했다.(같은책, 146p)
니체의 비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저에 깔린 그의 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것이 단순한 문학작품을 감상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그것은 삶이 이렇게 모순되고 불확실하고 고통에 가득 차 있고 나아가 거대한 자연에 비해 인간은 이렇게 미약하고 무력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즉 “삶의 정당화”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 문제에 직면하여 두 가지 치료제가 발명되는데 하나가 디오니소스적인 도취로 망아(忘我)의 상태에서 근원적 일자와의 합일을 이루는 예술가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유가 인과율을 따라 존재의 심연에 도달할 수 있음”을 믿고 이러한 베일 벗기기에서 즐거움을 찾는 “이론적 인간”(철학자)의 방식이다. 니체는 후자를 “소크라테스의 망상”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는 그리스적 명랑성에 반대되는 노예도덕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고 말하며 예술을 옹호한다.(같은책 100p)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답게 후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두 작가의 작품에서 특히 두 가지 차이점이 보인다.
코로스의 변화
니체는 음악이 비극의 본질이고 합창단(코로스)이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말한다. 그것은 합창단이 무대 위 가상의 세계를 보호하는 “성벽”이기 때문이다.(같은책, 119p) 디오니소스적 도취에 빠져 바쿠스의 여신도들처럼 광란의 춤을 추기 위해서는 현실의 냉정한 비판적 인식이 침투하지 못하게 막을 필요가 있다. 음악의 감동과 합창단의 노래를 통해 관객은 비극 속 주인공이 되고 물아일체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니체가 왜 아이스퀼로스를 높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 코로스는 분량도 작고 에피소드를 나누는 역할만 할 뿐 극의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반면에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코로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분량이 많고 그들의 대사는 노래 가사처럼 짧고 압축적이다. 반복되는 단어가 있고 대구를 이루는 등 소리내어 읽어보면 운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도 대화라기 보다는 긴 노래나 독백에 가깝다. 한편 『아가멤논』에서 보면 코로스장이 아이기스토스와 칼을 뽑아들고 싸움도 불사할 정도로 논쟁을 하며 극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기도를 올려야하는지 난감해하는 엘렉트라에게 코로스장이 기도내용을 알려주기까지 한다. 이러한 코로스의 중요한 역할은 관객이 극 속에 더욱 몰입하는 요소가 된다. 그에 비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는 코로스의 노래가 가사라기 보다는 대화에 가깝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도 짧은 일상 대화체 대사들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 음악적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은 현대의 오페라에,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연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신탁의 소멸
니체는 음악이 “의지”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생의 근원적 의지, 충동을 의미하고 개개의 인간은 이러한 생의 의지가 발현한 표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즉 생의 의지가 물자체라면 세상에 구현된 만물은 현상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리스 비극에서 신과 신탁의 절대성은 격렬하고 충동적인 생의 의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고 등장인물들의 행위들은 그것이 발현된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이 보다 힘의 의지를 잘 구현하였다. 신녀 카산드라의 예언대로 실행이 되고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불길한 꿈이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공포와 경외심을 느낀다. 오레스테스는 모친 살해의 복수를 신탁에 따라 충실히 이행했다. 마치 신의 대리인 같다. 더 나아가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는 아테네의 재판장에서 아폴론이 오레스테스의 변론을 대신해 주기까지 한다. 반면에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는 극을 전개 시키는 것이 신들의 예언과 신탁이 아니라 인간의 치밀한 계획이다. 메데이아는 크레온과 그의 딸을 독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기만전술로 크레온과 이아손을 속이고 안심시킨 후 계획을 성공시킨다. 심지어 아테네로 도망가기 위해 아이게우스를 설득하여 보증을 받아 놓기까지 한다. 오레스테스 역시 치밀한 복수계획을 수립하여 아이기스토스에게 통쾌한 복수를 성공시킨다.
군주와 노예를 가르는 시금석
한편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차이점이 더 드러나는데 그것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 복수의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되고 부각된다는 점이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에서는 『아가멤논』에서 아가멤논이,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아이기스토스가 살해당하는 장면에서 “아아, 정통으로 가격 당했구나” 같은 짧은 대사 한두 마디로 처리된다. 마치 베일에 가려진 욕조의 일부분만 보여주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화 속 한 장면이 연상된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와 『메데이아』에서 아이기스토스와 크레온이 죽는 장면은 무척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잔인하다는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이는 마치 액션 영화의 통쾌한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이러한 차이는 니체의 관점에 따르면 신이 움직이는 디오니소스의 세계에서는 생의 강렬한 충동과 의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구체적 장면이 중요하지 않은 반면, 인간이 움직이는 계획의 세계에서는 근원적 의지가 아니라 드러난 현상으로서의 표상이 중요해지고 따라서 구체적 장면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니체의 후기 철학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신의 세계는 “군주 도덕”을 인간의 세계는 “노예 도덕”을 상징한다. 고귀한 인간인 군주는 생의 의지에 따라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숭고한 목표를 추구하고, 과감히 행동하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면서 운명에 순응한다. 따라서 구체적 장면 하나가 아니라 전체적 플롯이 중요하다. 반면에 원한 감정에 휩싸여 스스로를 속이는 저열한 인간인 노예들은 오직 현재만을 중시하며 숭고한 목표를 추구하기 보다는 안락함에 빠져 약삭빠르고 교활한 계획으로 저 비극적 현실(삶의 정당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니체는 “노예의 명랑성” 혹은 “낙천주의적 요소”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노예에게는 자신의 계획이 맞아떨어지는 현재의 구체적 장면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전체적인 플롯의 긴밀성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를 통해 아이스퀼로스는 군주, 즉 위버멘쉬를 구현한 사람들을 관객으로 상정하고 작품을 썼고 에우리피데스는 노예들, 즉 노예도덕에 빠져 현실의 안락함에 빠져있는 나약한 사람들을 관객으로 상정하고 작품을 썼다고 볼 수도 있다. 니체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당신이 아이스퀼로스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이 더 끌렸다면 그것은 당신이 노예 도덕에 빠져있다는 증거라고. 그리스 비극은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황금과 돌을 가르는 시금석이자 자신의 삶을 비추는 진실한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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