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비교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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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산아래 작성일25-05-13 22:45 조회40회 댓글0건본문
그리스인들의 명랑성
그리스 비극의 탄생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난 디오니소스는 부활을 상징하는데 농사도 열매의 부활을 의미하기때문에 디오니소스는 술의 원료인 포도와 농경의 신이자 민중들의 신이 되었다. 민중들은 마을마다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의 봄맞이 축제로 디오니소스 제전을 열었다고 한다. 기원전 534년, 아테네의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각 마을의 축제를 한 곳에 모아 대 디오니소스 제전을 아테네 중심부(아고라)에서 개최하게 되었는데, 마을마다 불렀던 노래들을 모아 합창 경연대회를 열게 된 것이다. 이 즈음에 아이스퀼로스(BC525/4~456/5)와 에우리피데스(BC485/80~406)의 비극 작품이 탄생하였다.
비극의 효과, 공포(두려움)와 연민을 통한 카타르시스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는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은 서사시에 나오는 인물들의 고귀한 행위를 재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건을 겪고 있는 주인공들의 공포(두려움)와 연민이라는 비극적 감정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다.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을 겪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고, 두려움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의 불행에서 느끼는 것이다.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추체험하면서 카타르시스를 실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쾌감은 반드시 두려움과 연민이라는 비극 고유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야 하므로 작가는 이러한 감정을 산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정을 산출하는 것이 비극 고유의 효과를 산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뛰어난 작가는 이러한 감정이 실제로 공연을 보지 않고 줄거리(사건의 조직)만를 통해 일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잘 만들어진 줄거리는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사건들이 필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주인공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이 아니라 정반대로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하며, 이 불행이 주인공의 악행 때문이 아니라 중대한 과오 때문이어야 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토대로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비교해 본다면 두 작가의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친족살인은 그 자체로 비극적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은 각각 다르다. 아이스쾰로스가 이 사건의 필연성을 신(운명)으로부터 가져 왔다면, 에우리피데스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사건의 필연성, 운명과 욕망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은 “아르고스에 있는 아트레우스의 아들들의 궁전”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아트레우스 가문의 아들인 아가멤논, 그런데 이 가문은 그리스 신화 속에서 저주받은 가문으로 나온다고 한다. 지금은 “두 개의 왕좌와 두 개의 왕홀의 영광을 제우스 신에게서 함께 물려받은” 가문이다. 아르고스의 왕인 아가멤논은 스타르타의 왕인 메넬라오스의 형이다.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를 방문한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주인으로서 극진한 접대를 하였는데, 파리스는 이 접대에도 불구하고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벗어나 메넬라오스의 부인인 헬레네를 데리고 가버렸다.
제우스는 아트레우스의 아들들을 보내 파리스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출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의 독수리가 새끼를 낳기전의 어미토끼를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우스의 지지를 받고 트로이로 향하는 아가멤논의 그리스 함대 앞에 무서운 돌풍이 일게 하였다. 아가멤논은 신이 원하는 것이 처녀의 피라고 생각하고, 함대를 위해 제사를 지내려고 제 딸을 손수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새끼 양처럼 그녀를 제단에 올려놓되 가문을 저주하는 말을 내뱉지 못하도록 그녀의 아름다운 입을 틀어막으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가문을 저주하는 말’을 내뱉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이 장면은 이 작품의 첫 문장인 ‘아트레우스의 아들’이라는 문장과 연결되어 아이스퀼리스가 가문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아가멤논은 왕홀의 영광을 제우스 신에게서 물려받은 가문의 아들로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리스 함대를 이끄는 총사령관으로써 트로이에 짓밟힌 그리스의 명성를 되찾는 것이 더 명예로운 일이다. 그리하여 국가와 가문을 위해 자신의 딸을 포기하였다. 반면에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에서 메데이아는 콜키스의 공주의 자리를 떨쳐 버리고 이아손을 따라 코린토스로 향하였다. 메데이아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국가와 가문을 떠나 왔다. 그러나 결국 메데이아도 자신의 딸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사건에 이르렀다. 이 둘의 행위 중 누구의 행위를 고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해에도 일년 과정의 공부는 내게 벅찼다. 오후 수업은 거의 포기한 채 지나갔다. 책을 읽는 속도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나는 한 사람의 아내이자 엄마로써의 역할이 있었다. 더구나 시댁에는 집안 행사도 많았다. 공부와 집안 행사, 동시에 소화하기에는 벅차다. 아가멤논과 메데이아가 나의 두 입장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같다.
인간의 운명, 고통과 불행
아이스퀼로스는 아가멤논은 왜 이런 고통과 불행을 겪어야 하는가를 질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는 코러스를 통해 제우스는 “지혜로 이끌되 고통을 통해 지혜를 얻게 하였으니, 그분께서 세우신 이 법칙 언제나 유효하다”고 답한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성과 격정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인간의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아리스퀼리스는 운명(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하였다면 에우리피데스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운명과 욕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국가, 사회,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벗어날 수 없다. 이 관계의 필연성이야말로 운명이고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가멤논의 친족살인이 공동체의 폭력성이라면, 메데이아의 딸의 살해는 개별 욕망의 폭력성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비극은 이렇게 등장 인물들의 재현 행위를 통해 인간의 고통과 불행을 간접 체험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비극의 효과는 공포(두려움)와 연민을 통한 카타르시스였다. 이 카타르시스는 종교적으로는 제사를 통해 죄악을 털어낸다는 ‘정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을 그리스인들의 운명에 대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명랑성으로 이해해 보아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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