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 정리문⓶ 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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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정 작성일25-06-03 20:11 조회18회 댓글0건본문
초월적 논리학, 새로운 인식의 길을 내다
무한판단, 모순율에서 벗어나다
예전에는 A가 아니면 B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긍정적 삶과 부정적 죽음만이 있다고 규정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데 칸트가 말하는 ‘무한판단의 영역’은 이러한 생각에 균열을 만들어냅니다. 그가 말하는 무한판단은 ‘A is no(t) B'의 형태를 갖습니다. 그 예로 ’영혼은 불사적이다(비-죽음이다)’라는 문장을 들 수 있습니다. 영혼은 죽거나, 안 죽거나 이 두 가지인데, 이 두 가지 경우에서 벗어난 것이 ‘영혼은 불사적(비-죽음)이다’라는 문장입니다. 이는 “영혼을 불사적인 존재자들의 무제한적인 외연 속에 집어 넣(B97)고 있는 것입니다. 삶/죽음의 이분법을 넘어 산 죽음, 혹은 죽어 있는 삶이라는 역설적인 영역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혼은 비-죽음이다’라는 명제는 삶/죽음의 이분법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차원을 개방합니다. 이 명제는 긍정판단도 부정판단도 아닌 무한판단이라고 불립니다. 형식은 긍정이지만 형식의 이분법을 폐기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내용을 담지한 형식입니다. 여기에서 지금까지의 思考 영역과는 다른 지점이 생겨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이 삶과 죽음만으로 이루어진 이분법적 세계를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겠지요.
모든 것이 명료하게 나누어져 있던 세계를 벗어나면 무한판단을 발생시키는 칸트의 초월적 논리학과 만날 수 있습니다. 일반 논리학은 모든 것을 모순율에 의해서만 판단합니다. 따라서 영혼은 죽거나, 안 죽거나 이 두 가지여야 합니다. 일반 논리학에서는 비-죽음, 살아 있는 죽음(living dead) 같은 차원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칸트의 초월 논리학만이 살아있지만 죽은 자의 차원을 논할 수 있게 해줍니다. 초월 논리학은 삶/죽음의 이분법을 넘어 산 죽음, 혹은 죽어 있는 삶이라는 역설적인 영역을 만들어 냅니다. 일반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것은 안에 있지 않으면 바깥에 있어야 합니다. 또는 바깥이 아니면 안에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런 단순한 도식으로 포착되지 않는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 있긴 한데 그것이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그런 삶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삶은 재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재현된 것에서 재현 이상의 것을 찾습니다. 이러한 삶에서 욕망하는 것을 획득한 순간 그것은 욕망한 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만약 욕망의 대상을 얻어서 만족을 한다면 그 대상은 욕망했던 것이 아닙니다. 필요로 했던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끝내 욕망과 대상은 일치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칸트는 우리의 경험이 애초부터 경험 대상과 욕망 대상의 이중적인 분열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경험 대상과 욕망 대상이 나누어진다면 욕망의 대상은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경험 될 수 없는 욕망은 ‘산 죽음(living dead)이라는, 죽은 것보다도 끔찍한 무한판단의 영역으로 삶을 가져갑니다.
지성의 초월적 작업, 새로운 범주를 만들다
칸트의 초월적 논리학은 우선 감성적인 ‘잡다’라는 질료를 思考의 내용으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잡다로부터 인식을 얻기 위해서 “이 잡다는 먼저 일정한 방식으로 통관(通觀)되고 수득되어 결합되기가 요구”됩니다. 이를 “종합”이라고 합니다. 종합은 다양한 표상들을 서로 덧붙여 하나의 인식으로 정리하는 작업입니다. 이러한 종합이라는 작업으로 인하여 ‘잡다’라는 질료는 사고의 내용에서 하나의 인식이 됩니다. 그러니까 지성의 순수개념은 직관 일반에서의 잡다의 종합적 통일을 매개 합니다. 그리고 지성의 순수관념은 이 매개를 통해 자신이 받아들인 표상들에 대해 어떤 인식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성이 하는 초월적 작업입니다. 이런 인식, 혹은 판단이야말로 순수한 지성 개념의 역할입니다. 개념들은 이 표상의 상태로 주어지는 잡다들에 대해 종합과 통일이라는 선험적인 작업을 통해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잡다’ 상태의 표상들을 범주화 합니다.
칸트는 범주를 양의 범주들(단일성, 다수성, 전체성)과 질의 범주들(실재성, 부정성, 제한성)과 관계의 범주들(실체성과 우유성의 관계, 원인과 결과의 관계, 능동성과 수동자 사이의 관계)과 양상의 범주들(가능성-불가능성, 현존-부재, 필연성-우연성)로 나눕니다. 이와 같은 범주들은 새로운 인식을 가져옵니다.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살아 있는데 죽어있음의 영역인 질의 범주에 속하는 제한성이 새롭게 등장한 것입니다. 또한 쌍방폭행을 말해줄 수 있는 관계의 범주에 속하는 능동자와 수동자 사이의 상호작용도 새롭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성과 불가능성, 현존과 부재를 넘어선 필연성과 우연성의 범주도 새롭게 확장되었습니다.
분류표에서 각 항목 수가 셋으로 동일하다는 것도 생각해야할 부분입니다. 예전에는 ‘긍정/부정’ 같은 이분법밖에는 없었습니다. 이 삼분법은 칸트의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범주표는 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양과 질의 범주는 직관 대상들을 겨냥하고 있고, 관계와 양상의 범주는 대상들의 실존(existence)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양적인 대상들과 질적인 대상들을 다루는 첫 번째 부분을 ‘수학적(mathematical)’ 범주라고 말하고 대상들의 실존을 겨냥하는 두 번째 부분은 ‘역학적(dynamical)’ 범주라고 부릅니다(B110). 이렇게 칸트는 인식을 ‘수학적(mathematical)범주와 ’역학적 ‘(dynamical) 범주라는 새로운 지성으로 안내합니다.
범주들의 초월적 연역, 인식대상의 객관성을 정초하다
칸트가 말하길 감성은 우리에게 직관의 형식을 주지만 지성은 규칙(자연의 법칙)을 준다고 합니다. 지성 자신이 자연 법칙들의 원천이고 자연의 형식적 통일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들의 초월적 연역입니다. 우리가 ‘현상들’만을 문제 삼는다면 선험적 개념들이 대상들의 경험적 인식에 선행한다는 것은 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그것이 필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현상들이라는 대상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는 상상을 이룰 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표상들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선험적 개념에 의해 통일될 수 있습니다.
칸트의 초월적 연역의 핵심 주장은 인식주관(성)이 모든 대상(경험)의 객관성을 정초한다는 정의입니다. 객관성이라고 하면 우리 바깥의 저 객관(대상)이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칸트는 우리 주관이 경험의 객관성을 정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우리의 인식 주관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식 주관의 선험적 개념(범주)이 모든 경험을 가능케 하는 필요조건이자 심지어 자연에 법칙성까지 부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신은 만물의 원인이다’라는 문장을 가지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신’이 만물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은 만물에 속하기 때문에 ‘신’이라는 원인의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인 ‘신’은 우리 밖에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신’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이념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라는 객관(대상)은 우리 주관이 정초한 경험의 객관성으로 머물게 됩니다. 이제 저 밖의 대상의 근거는 우리의 인식 주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밖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여겨졌던 삶과 죽음이라는 객관도 우리의 인식 주관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외부에서 내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던 神, 삶, 죽음 등등이 나의 인식주관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지금, 교통 事故를 만나듯 멍해집니다. 초월적 연역은 이렇게 점점 모호한 思考의 안개 속으로 인식을 인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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