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강의 정리문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산아래 작성일25-04-01 20:35 조회27회 댓글0건본문
정리문①/수성/2025.4.2/안미선
인식이란,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종합
칸트 이전에는 인식이 대상에 준거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식의 진위는 정확한 재현 여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인식이 대상에 준거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에 준거하는 것으로 사고를 전환해 보자고 합니다. 그리하여 칸트에게 “인식이란 경험적인 것에 대해 선험적인 것이 작동해서 만들어지는 것”(53p.)이 됩니다. 이 선험적인 것의 활약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경험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 선험적인 영역 없이 ‘순수하게’ 경험적인 것만으로 조합된 대상과의 만남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선험적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칸트에 따르면 수를 센다는 것, 혹은 수라는 것은 경험적인 게 아니라 우리 의식 안에 있는 선험적 능력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습니다. 잠시 후 또 한 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총 두 대가 지나간 것인데요. 그런데 이 ‘두 대’라는 사실은 자동차가 스스로 두 번째 자동차라고 하면서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대상 자체는 스스로 자신이 몇 번째인지 알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식하는 행위는 경험적인 대상에만 구속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영역이 있는데 칸트는 이 선험적인 영역을 중심으로 대상을 고찰해 보자고 합니다. 그런데 칸트는 왜 이러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을까요?
반영하는 주관에서 구성하는 주관으로
만약 우리의 인식이 대상에 달려 있다고 하면 우리 인식을 확장하려는 시도(형이상학)는 불가능해집니다. 경험할 수 없는 대상(신, 영혼, 세계의 시작과 끝)의 경우, 이런 개념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험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사고합니다. 따라서 인식이 대상에 준거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에 준거한다고 생각하면 경험과 관계없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 선험적으로 사고할 길이 열립니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으로 이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실증할 수 없는 영역”인 형이상학의 진위에 대한 판별이 가능해집니다. 저 경험 바깥의 세계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계를 논하는 우리의 인식 능력 자체를 따져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의 유무는 우리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것이므로 아무리 주장하여도 정답이 나올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 자체, 즉 선험적인 인식 자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이것 자체에 대해서도 진위를 논할 수 있게 됩니다. 칸트는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에는 경험적인 대상에만 구속된 것이 아니라 선험적이 영역이 있다는 것이고 기존의 인식 방법과 달리 그런 선험적인 영역을 중심으로 대상을 고찰해 보자고 합니다.
그리하여 대상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 대상으로 달려가는 게 아니라 대상 이전에 대상의 구성을 위해 활동하는 우리의 선험적 인식에 대하여 고찰합니다. 이것은 대상을 ‘반영하는 주관’ 대신 대상을 ‘구성하는 주관’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칸트의 새로운 시도에 의해 가능해진 것입니다. 대상을 구성하는 주관이라는 사고의 전환으로 인간의 능력들을 구분하는 동시에 영역들의 구분도 철저히 할 수 있게 됩니다. 칸트는 인간에게는 3가지 능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인식/판단), 욕망하는 능력(의지), 그리고 쾌·불쾌의 능력(감정)입니다. 인식능력이 지성을 원천으로 한다면, 욕망하는 능력은 이성을 원천으로 하고, 쾌·불쾌의 능력은 상상력을 원천으로 합니다.
주관에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 직관과 개념(범주)
그러나 지성의 인식능력은 사물 자체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이 표상으로 받아들인 것들을 종합하고 구성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감성에는 두 가지 형식이 선험적으로 주어졌는데 ‘시간’과 ‘공간’이 그것입니다. 이 시간과 공간을 ‘직관의 형식’이라고 합니다. 시공간이라는 직관의 형식에 의하여 포착된 것이 ‘표상’입니다. 우리는 이 표상을 받이들이는 능력(인상들의 수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표상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인식의 자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상들을 수용하는 능력에 의해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므로 ‘직관’이라고 하고, 인식의 자발성에 의해 대상과 관련하여 사고되므로 ‘개념’이라고 합니다. 포성이 들리고 건물이 무너지면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 공포의 장소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이런 직관적 질료(내용)들을 모아 ‘전쟁이다’라는 대상 규정을 하게 되는데, 이 대상 규정이 바로 개념입니다. 우리의 인식의 요소는 직관과 개념입니다. 그래서 대응하는 직관 없는 개념이나 개념없이 주어지는 직관은 인식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직관이 감성적이라면, 그것은 대상에 의해 촉발되는 방식만을 갖는 게 직관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감성적 직관의 대상을 사고하는 능력은 지성입니다. 감성이 없으면 대상이 주어질 수 없고, 지성이 없으면 대상에 대한 사고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내용 없는 사상들은 공허하고, 개념들 없는 직관들은 맹목적”(B75)이게 됩니다. 직관적 질료(내용) 없이 순수한 개념들만 있으면 그 개념은 공허할 수밖에 없고, 직관들만 있으면 그런 표상들을 통합해 주는 개념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또한 이 두 능력은 그 기능을 서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고, 감관들은 아무것도 사고할 수 없습니다. 대상에 대한 판단(인식)에 오류가 생겼다면 그것은 감관의 문제가 아니라 지성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감관들은 ‘마음의 수용성’이기 때문에 경험적 직관들을 받아들일 뿐 그것에 대해 사고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성과 지성은 인식에 있어 두 요소이지만 이 두 요소의 이종성이야말로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이해에서 핵심적입니다.
형이상학의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 탐구
칸트에게 선험적인 영역은 학적 진리의 요건인 보편성과 필연성이 확보되는 영역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경험적인 영역을 만나지 못한 선험적 인식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장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선험적이면서도 선험적인 것을 넘어서는 영역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험적이기만 한 명제(완전한 신은 존재한다)는 형식적으로는 진리이지만 경험적으로는 그 진리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칸트가 보기에 기존의 형이상학은 분석명제에 기반한 인식을 가지고 그것이 경험적으로도 확인 가능하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저 형식논리에 불과한 형이상학이었습니다. 이에 칸트는 분석판단의 선험적 명제에 종합판단의 경험적 명제를 종합하여 형이상학에서의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분석판단은 주어 개념 안에 술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주어만 분석하면 술어는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필연적인 명제입니다. 그러나 분석판단은 동어반복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인식에 기여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인식했다거나 진리에 이른다는 것은 개념 수준의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차원에서 그 개념에 해당하는 내용을 확인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개념 바깥의 확장성을 확보한 종합명제에 기반한 인식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합판단의 경험적 명제의 경우는 그 진리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주어 개념의 분석에 그쳐서는 안 되고 그 개념 바깥으로 빠져나와 현실적 경험 속에서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어 개념과 그 개념 바깥의 경험적 현실을 종합하여 사실 확인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