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작가 비교 글쓰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소정 작성일25-05-13 19:40 조회34회 댓글0건본문
비극작가 비교 글쓰기 / 수성 / 2025. 05. 14 / 정태미
비극이란 무엇인가
비극을 만든 요소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작품 <아가멤논>에서 아가멤논은 전쟁에 나가면서 딸을 제물로 희생시키고 트로이의 왕녀 카산드라를 노예로 끌고 온다. 하지만 그의 행위는 악의가 없었기에 과오라고 말해진다. 그런데 그러한 과오로 인하여 아가멤논은 아내에게 죽임을 당한다. 여기에서 아가멤논이 그렇게 꼭 죽임을 당할 만큼의 과오를 저질렀는가 하는 질문이 생겼다. 그리고 이 질문은 연민으로 나아간다. 또한 아가멤논의 입장이 된다면 나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공포를 느낄 수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은 뭔가를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했고, 그것이 연민과 공포라고 했다. <아가멤논>뿐만이 아니라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작품들인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도 관객들은 연민과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복수하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는 이에 순종해서 어머니를 살해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에 대한 패륜이었다. 이와 같은 오레스테스의 행위에 대한 재판에서 배심원들의 판결은 무죄 50, 유죄 50으로 팽팽하게 맞선다. 여기에 아테네 여신이 무죄 표를 던져 오레스테스는 재판에서 이길 수 있었다. 이에 관객들은 오레스테스에 대한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연민과 공포는 스스로의 의지로 재판장에 선 오레스테스의 행위로 인해서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재판장에 스스로 올라섬으로써 자신의 과오를 자유의지로 책임진 것이다. 하지만 재판에서 아테네 여신이 무죄에 한 표를 던지기 전에는 무죄에 투표된 숫자가 유죄에 투표된 숫자와 대등하게 나왔다. 오레스테스는 유죄이기도 하고 무죄이기도 한 상태였다.
오레스테스에 대한 배심원들의 무죄 50, 유죄 50의 판결은 그의 행위가 정당하고도 부당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정당하고도 부당하다는 비논리를 생성하는 판결에서 오레스테스를 지탱해준 것은 아테네여신이었다. 아테네 여신은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보다 가장인 아버지를 어머니가 살해하는 것이 공동체 유지에 더 큰 죄가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신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어머니에게 아들이 복수한 행위가 정당하다고 판결한다. 하지만 아테네 여신의 판결 전에 배심원의 판결이 유죄 50, 무죄 50으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기에 오레스테스의 행위를 무죄로 성립시키는 근거는 부실하게 된다. 이 무죄성립의 근거가 부실한 무죄판결로 인하여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살해한 패륜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연민과 공포가 생겨난다.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복수의 여신들>은 진정한 비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극이 붕괴된 이유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인 <엘렉트라>, <트로이의 여인들>, <메데이아>에서는 갈등을 해결할 방법이 없을 때 신이 등장한다. <엘렉트라>에서는 엘렉트라가 어머니를 살해하려고 동생인 오레스테스를 부추긴다. 그 후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의 신변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신의 신탁이 내려온다. 그래서 엘렉트라는 신탁대로 오레스테스의 친구와 결혼을 해서 고국을 떠나게 된다. 어머니 살해로 인하여 엘렉트라가 갖게 된 갈등이 신탁으로 해소된 것이다. 이에 연극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장면까지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트로이의 여인들>에서는 트로이를 멸망시킨 그리스 연합국의 귀국길이 고통스런 여정이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하지만 연극이 끝날 때까지 그 신탁은 실현되지 않는다. 이에 귀국길에 겪는 고통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연민과 공포는 느낄 수 없게 된다.
<메데이아>에서는 메데이아가 남편과 결혼할 크레온 왕의 딸을 독살하고 자신과 이아손의 자식들인 두 아들을 죽인다. 그리고 그와 같은 행위에 따르는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그녀는 신의 도움으로 하늘을 나는 수레를 타고 도망가게 된다. 여기에서도 연민과 공포는 생겨나지 않게 된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들에서 등장인물들은 운명을 스스로의 의지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갈등은 신에 의해 해소된다. 서사적 갈등의 해결을 기계장치의 신에게 맡긴 것이다. 신이 모든 일의 해결사가 되는 순간 신은 인간의 욕망을 실천해주는 기계이상의 무엇도 아니게 된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들에서 ‘등장인물들의 행위에 꼭 그렇게 처벌을 받았어야 하는가?’라는 연민은 없어졌다. ‘나도 같은 상황이라면 행위에 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공포도 사라졌다. 이는 비극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비극에서는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인물에 의해서 연민과 고통이 생겨나는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행위가 운명에 순응함일 것이다. 운명에 순응하여 스스로의 과오에 책임을 진다면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삶은 가치를 가질 듯하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작품에서의 인물은 자기의 행위를 오롯이 껴안아 책임지는 모습을 보인다. 비극에서 영웅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과오를 책임지는 자이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에서는 신이 갈등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과오를 책임지는 인간의 영웅적 행위는 없어진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작품인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는 아폴론이나 아테네, 복수의 여신들도 자신의 행위가 운명에 어긋나지 않음을 재판장에서 말해야 했다. 신조차도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운명에 묶여 있음을 보여준다.반면에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들에서는 신이 등장인물의 어려운 상황을 기계적으로 현실을 뛰어넘어서 해결해준다. 여기에서는 운명은 피할 수 없으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살아야한다는 그리스적 명랑성이 사라진다. 그리스적 명랑성이 사라진 지점에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자식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메데이아가 존재하게 된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작품에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으로 넘어가면 비극의 성격이 그리스적 명랑성에서 낙관주의로 바뀐다. 과오를 저질렀는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낙관주의는 비극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행위의 과오를 온전히 어깨에 올려놓고 책임지는 모습이 비극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