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비교 글쓰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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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산아래 작성일25-08-09 21:09 조회79회 댓글0건본문
비극의 원천, 신탁과 욕망 그리고 죽음
1. 소포클레스의 비극
소포클레스(BC497/6~406/5)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아폴론으로부터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살을 섞을 운명이며, 아버지를 살해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리하여 부모와 함께 살던 코린토스를 떠나 떠돌다가 테바이에 이른다. 그러나 테바이에서 라이오스 일행을 만나 그를 살해하게 된다. 신탁을 피하고자 한 그의 행위가 결국 친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살해하게 된 것이다. 앎의 역설, 신탁을 자기 삶의 토대로 한 오이디푸스를 통해 소포클레스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니였을까.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역병으로부터 도시를 지켜야 하는 위기에 처한다. 그리하여 크레온에게 신탁을 받아 오라고 한다. 신탁은 도시를 오염시킨 사람을 추방하라는 것이었다. 오이디푸스는 눈 먼 예언자로부터 도시를 오염시킨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스핑크스의 질문에 답하여 테바이를 재앙에서 구한 오이디푸스는 테바이를 오염시킨 사람으로 추방 당할 위기에 처한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의 정답은 알았으나 정작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서는 알지 못하였다. 앎의 한계, 그리스 비극이 말해 주려던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니였을까.
눈 먼 테이레시아스로부터 오이디푸스는 “그대가 찾고 있던 범인이 그대”라는 것, 아내인 이오카스테로부터 아들로부터 살해될 것이라는 라이오스에게 내려진 신탁에 의해 그의 아들은 태어나자 마자 버려졌는데, 그 아들이 자신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와 한 침대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 앎의 진실, 자신의 삶이 결코 혈족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그리스인들의 통찰이 비극에서 혈연을 중요시한 것일까.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은 “친부 살해자로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운명”이라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이 친부살해에 대한 예언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므로, 자신이 죄인이 되어 추방 당한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 항변한다. 더구나 추방 당할 위기에 처하였을 때. 아들들이 한마디도 해주지 않은 까닭에 자신이 내쫓겨, 쉴새 없이 거지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원망한다.
『오이디푸스의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행위에 스스로 책임을 물어 스스로 눈을 찌르고 추방 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자신이 추방된 것은 아들들이 자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원망한다. 결국 아들들이 신탁(혈연)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삶의 토대가 되는 것은 신탁(혈연)이다. 이를 통하여 비극은 앎의 역설, 앎의 한계, 앎의 진실을 말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인들의 삶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으로 주인공들의 행위가 ‘악행이 아닌 과오’라고 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행위가 악행이 아닌 과오라는 통찰은 선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는 『오이디푸스 왕』을 비극의 모든 요건을 갖춘 가장 짜임새 있는 드라마라고 『시학』에서 극찬하였다. 그는 『시학』에서 비극이란 고귀한 행위를 재현하는 것인데, 주인공들에 의해 재현된 행위는 관객에게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불러오게 한다. 그리고 이 감정은 주인공의 행위가 악행이 아닌 과오(부득이한 행위)라는 점에서 카타르시스에 이어지게까지 해준다고 하였다.
2. 셰익스피어의 비극
월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 작가인 소포클레스가 인간의 욕망을 신탁(혈연)과 관련하여 해석해 보려고 하였다면,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인간의 욕망을 양심과 대비시키는 동시에 욕망을 죽음과도 연결시켰다.
그의 작품 『햄릿』에서도 “존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통해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유령의 모습으로 햄릿 앞에 나타난 햄릿의 아버지는 지금의 왕인 동생에게 독살 당했다며 복수해 줄 것을 원한다. 그러나 햄릿은 자신의 복수에 선과 악이 모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버지를 살해한 삼촌에게 복수한다는 것은 정당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 또한 살인자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는 복수를 계속 지연시킨다.
『햄릿』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자신의 복수를 지연시키면서 기도와 연결하는 장면이었다. 햄릿은 삼촌에게 복수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계속 망설인다. 물론 삼촌이 진짜 범인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삼촌이 기도하는 중에 죽인다는 것은 그를 천당에 가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복수를 지연시킨다.
『맥베스』에서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을 빌미로 자신의 권력욕을 극대화한다. 덩컨 왕을 죽이고 왕이 된 그는 마녀의 예언을 함께 들은 뱅쿠오마저 살해한다. 그러나 그는 벵쿠오의 망령에 계속 시달리게 되면서 마녀들을 다시 찾아가 다시 예언을 내려 줄 것을 청한다. 그러나 그에게 남겨진 것은 불안감과 공포 뿐이다. 『오셀로』에서 오셀로는 이아고(자신의 내면)를 통해 자신의 욕망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근대의 인간상을 보여준다.
이렇게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욕망과 양심이 중첩되어 작동하고 있는 근대인의 복잡한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햄릿이 계속 복수를 지연시키는 모습에서도, 자신이 원하던 것을 다 이루었는데도 불안감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 맥베스도, 많은 것을 이루었는데도 자격지심에서 오는 질투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오셀로가 그러하다.
소포클레스가 그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신탁을 통해 해석하므로써 악행이 아닌 과오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체계를 보여 주었다면,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분별하는 근대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선악이라는 이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그 토대가 기독교에 있으므로 죽음을 해석하는 방식도 그리스인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3. 죽음과 구원
비극 작품에서 또 하나의 인상 깊었던 것은 죽음을 구원과 연결하는 지점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친부 살해자로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운명”이라고 탄식한다. 그러한 오이푸스에게 내려진 신탁은 자신이 속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 즉 콜로노스의 주민과 그곳의 왕인 테세우스로부터의 인정이다. 과오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통해 해결하여야 한다.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라는 것, 그리하여 안티고네도 오빠의 매장을 자신의 운명/몫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다.
반면에 햄릿에게 유령으로 나타난 아버지는 성체도 종부종사도 없이, 그래서 아무런 죄 청산도 못하고 심판대로 보내졌다고 복수해 달라고 청한다. 햄릿도 끊임없이 그 복수 행위를 기도와 연결시키면서 지연시켰다. 왜냐하면 복수를 한다는 것은 살인을 하는 행위이다. 선악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부득이한 행위라도 죄악라는 척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죄악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기도를 통해 신으로부터 받는 은총을 통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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