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 최종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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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동엽 작성일25-09-06 21:59 조회60회 댓글0건본문
수성/ 최종 에세이/ 25, 9, 10/ 이동엽
산업재해 문제에 대하여
반복되는 사고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7월 29일 국무회의에서 산업재해 근절을 주제로 국무위원들과 토론했다. 그리고 역대 처음으로 이를 생중계하며 산업재해 문제에 관한 강한 해결 의지를 보였다. 고용 노동부 장관에게는 “산재가 줄지 않으면 직을 걸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철저한 단속을 주문하였다. 대통령이 이렇게 산업재해 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지난 2021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대재해 처벌법)이 제정되었음에도 산재 사망률이 줄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1만 명당 39명(OECD 평균은 29명)으로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다. 그리고 산재 선진국이라는 불명예를 수십 년째 유지하고 있다. 지난 2018년 태안 화력발전소의 노동자 김용균 씨의 사망사건으로 촉발된 사회적 관심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중대재해 처벌법이라는 결실을 낳았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상황은 바뀌지 않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이번 국무회의에서 논의된 대책들은 이전의 논의를 그대로라는 답습하는 것이었다. 사업주와 경영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단속을 강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점에서 지난 2018년의 논의와 달라진 점이 없었다. 물론 정부가 강력한 법 집행 의지를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발전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과연 사업주를 처벌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지는 의문이다. 그 이유는 산업재해가 단지 사업주와 노동자 양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 중간 관리자, 동료, 가족, 노동조합, 경찰관, 법관, 의사, 공무원(근로복지공단) 등등 다양한 관계자가 얽혀있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난 2023년 윤석열 정부는 사회의 불법 카르텔을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건설노조를 건설 폭력배로 몰아 탄압했고 그 결과 노조 활동이 위축되면서 노조의 요구로 도입된 건설 현장의 안전 조치들이 철회되었다. 당시 경찰은 노조의 정당한 요구를 ‘협박’으로 둔갑시켰고 법관은 노조 간부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였다. 이른바 “건폭몰이”(『노가다가 아닌 노동자로 삽니다』, 이은주 등 6인, 한겨레 출판, 42p) 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정부가 바뀌고 정책이 바뀌어도 이를 집행하는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부가 압력을 넣어도 불과 2년 전 노동자를 체포하던 경찰관이 한순간 돌변하여 사업주를 체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대재해 처벌법이 제정되었지만, 수사와 재판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실효성이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협소한 기술적, 공학적 접근에서 벗어나 일과 노동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을 바꾸는 대전환이 필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칸트는 우리의 인식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인식을 따른다는 관점의 전환을 통해서 형이상학에 혁신을 일으켰다. 그는 이를 별 무리가 관찰자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기존의 가정을 관찰자가 회전하고 별들은 정지해 있다는 가정으로 바꿔 천문학에 발전을 가져온 코페르니쿠스의 사례에 비유하였다. 칸트의 혁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기존의 질문을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는 비판적 질문으로 바꾼 것이다. 이러한 비판 작업을 통해서 사변이성은 범주라는 선험적 개념을 감성적 한계를 넘어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를 인간은 오직 표상으로서의 현상만을 알 수 있을 뿐 경험 너머의 물 자체는 알 수 없다는 초월적 관념론이라고 한다. 그리고 칸트는 이를 통해서 그동안의 형이상학이 헛된 가상에 기초해 있음을 밝히고 관련한 형이상학의 난제들을 해결하였다.
이러한 칸트의 비판적 방법론을 산업재해 문제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산업 현장에서 인간이 작업장(객체)의 조건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작업장이 인간(주체)의 조건을 따라야 한다는 가정으로 바꾼다면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 외부에 있는 객체를 중심으로 문제에 접근하면 산업재해는 해결이 쉽지 않다. 정해진 공사 기한에 맞추기 위해서는 무리해서 일을 할 수밖에 없고 하도급 과정에서 줄어든 한정된 공사비 안에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는 안전 조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 도어 수리기사 사망사건에서처럼 고장 신고 접수 후 1시간 이내 현장 도착이라는 계약조건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2인 1조 작업이라는 안전 수칙을 준수할 수가 없었다.
수학적 이율배반
칸트는 외부의 대상이 우리의 선험적 인식 조건에 따라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실존한다고 보는 초월적 실재론을 따를 경우 어떠한 문제가 생기는 지를 『순수이성 비판』에서 이율배반이라는 이름으로 다루고 있다. 한쪽이 참이면 다른 쪽은 거짓일 수밖에 없는 양립할 수 없는 두 명제를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종적인 시간과 공간을 전제로 하고 있어 계열의 항 들간의 질적인 비약이 불가능한 상충을 수학적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사례들을 통해서 산업재해 사고의 근저에는 기본적으로 이윤과 안전의 상충이라는 이율배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충을 명제로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정립: 이윤에는 한계가 없다, 반정립: 이윤에는 한계가 있다. 정립이 기업가의 주장이라면 반정립은 노동자의 주장이다. 설사 노동자가 사망하더라도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는 기업가의 생각 속에서 이윤은 모든 한계를 초월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관점에서 이윤은 안전이라는 한계를 결코 넘을 수 없다.
이윤이라는 개념은 시간과 공간을 전제한 개념이다. 공사 기간을 줄이면 이윤이 늘어나고 작업 공간을 줄이면 이윤이 늘어난다. 따라서 이윤은 절약한 시간과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대상을 인식하는 하나의 형식으로서의 표상일 뿐이지 외부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절대적 시간과 공간을 전제한 이윤이라는 개념은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 초월적 가상에 불과하고 따라서 두 명제는 모두 거짓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결은 난점이 양자 간의 “타협이 아니라 매듭을 완전히 절단해 버림으로써만 제거”(『순수이성 비판』, B557)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해결책이다. 기업가는 이윤이 없어서 불만이고 노동자는 일자리가 없어서 불만족스럽다.
역학적 이율배반과 자유
하지만이때 관점을 외부의 객관 중심에서 인간이라는 주체 중심으로 바꾸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관계와 양태 범주에 따른 상충을 역학적 이율배반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그 계열 안에 원인과 결과,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과 같은 이종적인 항들이 포함되어 있어” 계열 안에서 질적인 비약이 가능하다. (『칸트 사전』, 백종현, 아카넷, 683p) 인간의 정신이라는 형이상학적 요소를 도입하면 문제는 유한과 무한의 상충이라는 수학적 이율배반에서 “물리적 현상세계의 인과 필연성과 인간 정신의 자유라는 역학적 이율배반으로 넘어가게 된다.”.(『칸트 윤리학』, 박찬구, 세창출판사, 108p) ‘나’라고 하는 자기 인식 즉 초월적 주체를 도입함으로써 현상의 계열을 넘어 물 자체의 영역이 열리게 된다. “역학적 계열은 예지적인 것, 즉 이종적인 조건도 허용하며 이로써 이성을 만족시키고, 무조건적인 것이 현상들 앞에 놓인다.” 여기서 무조건적인 것이란 초월적 자유를 말하는데 이는 “한 상태를 자리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으로 시간상에서 규정한 다른 또 하나의 원인 아래 종속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자유 개념을 도입하면 산업재해 문제의 근본적 상충을 해결할 길이 열린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도덕적 결단, 즉 자유를 산업 현장의 인과 관계의 고리에 한 요소로 도입하는 것이다. 건설 현장의 하도급 구조의 계열은 원청사-시공사-건설업체-팀장-노동자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이 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이윤의 법칙이라는 현상세계의 자연 필연성에서 벗어나 예지계의 초월적 자유를 발휘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공사가 안전 비용을 삭감한 채 하도급을 주더라도 건설업체가 어쩔 수 없다는 변명 대신 그 도급 제안을 거부하는 자유를 발휘한다면, 팀장이 위험한 야간작업을 지시하더라도 노동자가 이를 거부하는 자유를 발휘한다면 산업재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산업재해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사업주를 처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작업장에서 “자유를 구출”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무릇 현상들이 사물들 그 자체라면 자유는 구출될 수 없다”라는 칸트 말이 울림을 주는 이유다.
인간이라는 보물
소포클레스의 비극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임종이 임박하자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아이게우스의 아들이여, 내 그대에게 이 도시를 위하여 세월을 타지 않는 보물이 될 것을 가르쳐주겠소.”(『소포클레스 비극전집』, 천병희 역, 숲, 218p) 이때 이 보물이란 무엇일까? 소포클레스는 작품에서 이 보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테세우스에게 당부할 뿐이다. “하지만 그대는 누구에게도 그 장소를 말하지 마시오...그러면 그 장소는 수많은 방패보다 더 훌륭히, 도우러 온 이웃의 창보다 더 훌륭히 그대를 지켜줄 것이오. 말해서는 안되는 신성한 것들은, 그대가 혼자 그곳에 가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신성한 무덤, 즉 그 보물은 오이디푸스의 삶 그 자체가 아닐까? 그는 신탁이라는 운명의 필연성에 맞서 자신의 눈을 찌르는 도덕적 결단을 통해 비로소 신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었다. 그의 삶을 칸트의 이론으로 해석하면 오이디푸스 역시 자연 필연성의 인과 계열에 자유라는 예지계적 요소를 도입함으로 현상세계에 전혀 다른 인과 계열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오이디푸스 이야기 속에서 인간이라는 보물을 발견한다.
따라서 산업재해 문제는 문제 속에 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를 내는 것도 인간이고 답을 찾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2016년의 구의역 사고, 2018년의 태안 화력발전 사고, 그리고 2025년의 SPC 사고와 같이 사회적 관심을 일으킨 사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화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구의역 사고에서는 수리기사의 가방에서 발견된 컵라면과 나무젓가락이, 태안 화력발전 사고에서는 사고 몇 개월 전 찍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내는 김용균씨의 피켓 사진이, 그리고 SPC 사고에서는 피해자가 당일 남자 친구에게 보낸 “너무 졸립다”는 카톡 문자가 사람들을 슬프게 했다. 산업재해 문제가 이렇게 우리를 끊임없이 붙잡는 이유는 이윤과 생명이라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을 교환했다는 뒤늦은 자각,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두 개를 같은 차원에서 비교했다는 뒤늦은 깨우침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해결책 역시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곳에 있다. 마치 오이디푸스의 무덤처럼 오로지 혼자 있을 때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최고의 방패이자 창인 인간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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