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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화 작성일25-09-06 22:05 조회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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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수영스쿨 수요 대중지성/ 2025.09.06/이미애

칸트의 현상계, 예지계와 동학천도교의 시천주(侍天主) 비교

주체의 이동

근대는 주체의 발견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주체가 신적 권위나 자연으로부터 독립된 자유로운 인간존재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근대적 주체는 데카르트에 의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철학적 명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인식한 것과 그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의 일치는 코기토에 의해 확보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만약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대상과 표상의 일치 문제 는 해결이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대상이 우리 인식에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의 활동에 필요한 일차적인 것이라면 이제 일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칸트는 이러한 일치 구도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칸트는 대상이 주어질 때 이성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규칙과 개념들을 통해서 대상(현상)을 종합하고 구성하 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성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 는 것이 아니라 그 표상들을 구성하고 종합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현상과 물자체. 대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주관이 직접 대상에 입법하는 상황 속에서 인식 주관은 시공간적 직관 형식 없이는 대상에 다가갈 수 없게 됩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공간에 의해 포착된 현상과 그 직관 형식 바깥의 물자체가 구분이 됩니다. 우리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루는 것은 실천이성이 아닌 사변이성입니다. 대상에 대해 표상하고 대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이성, 대상의 보편적인 법칙을 사유하는 이성, 이 생각하는 이성의 한계가 물자체입니다. 물자체를 우리가 직접 만날 수 없습니다. 인식의 한계를 알고 지성의 자리와 가상의 자리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해야 합니다. 지성은 자신의 개념들(범주)과 선험적 원칙들을 경험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를 설정하고 현상계와 예지계를 나누어 설명합니다. 감성적 직관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들이 범주들의 통일에 의해 대상들로 사고되는 한에서 그것들은 현상체(phenomena)입니다. 그렇다면(인간과 같은) 감성적 직관의 대상이 아닌 그런 대상, 예지적 직관에 의한 대상이 있다면 그런 사물들은 예지체(noumena)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칸트의 현상계, 예지계와 동학천도교의 시천주 사상을 비교함으로써 양자의 차이점 과 유사성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원론과 일원론

‘어떤 사물’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감각을 통해 현상하는 대로(감성적 직관에 의해) 표상하고 지각합니다. 그런데 이 어떤 사물은 그 자체로는 물자체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감성적 직관에 의해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표상들 뿐이기 때문에 이 표상들의 종합에 있어 그 대상으로 삼고 있는 외부의 저 객관은 ‘초월적 객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으로는 저 초월적 객관이 어떤 것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지성의 개념과 종합 활동 이외에 저런 대상을 포착할 장치나 ‘설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표상에 대응하는 우리 바깥의 어떤 대상, 우리의 감성에 독립적인 대상, 그러면서 우리에게 현상으로 나타나는 그런 대상이 예지체입니다. 그러나 이 예지체라는 개념은 결코 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지체에 해당하는 그런 사물이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어떤 것 일반에 대한 ‘사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지체 개념은 순전히감성의 참월(僭越)을 제한하기 위한 한계 개념이며, 단지 소극적 사용만을 갖습니다. 즉 감성적 인식의 영역이 지성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까지 도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시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지성이 예지계에서 자신의 객관성을 주장하면 가상에 빠지게 됩니다. 칸트에게는 예지계는 이상적인 세계도, 물자체의 세계도 아니고 지성과 감성의 한계적 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비실재적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이 세계 바깥의 세계가 아니라 그저 생각만 할 수 있는(intelligible)세계입니다.

칸트는 인식을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 현상체와 예지체로 구분했습니다. 이와 비교하여 천도교의 시천주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시천주(侍天主), 사람이 한울님을 모셨다는 뜻으로써 사람이 한울님과 하나인 ‘인내천(人乃天 )이라는 뜻입니다. 수운(최제우)은 1860년 영적 체험에서 하늘로부터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吾心卽汝心)”1)와 “귀신이라는 것도 또한 나다(鬼神者吾也)”라는 말을 듣습니다. 즉 고요한 하늘 마음도 사람 마음과 같으며 활동하는 음과 양의 마음 기운도 또한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이로부터 사람이 천주(한울님)을 모셨다는 표현이 가능합니다. 시천주가 사람이 하늘의 이치를 그대로 품부받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은 한울님의 표현입니다. 내유신령이 외유기화하는 것 즉, 신령의 내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거울 본체와 거울의 반영작용이 둘이 아닌 것처럼 천도교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신성과 연결 되어 있어 세계를 둘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칸트처럼 예지계가 현상계와 구분된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통합된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수운의 제자 해월에게도 유사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해월은 사람이 모시고 있는 천주를 천지부모(天地父母)로 표현합니다. 천지부모라는 표현에는 천지와 부모가 똑같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천지라는 예지계와 부모라는 현실세계를 하나로 관통시키는 것입니다. 천지가 곧 부모이기 때문에 천지에 대한 효도는 사람이 가야할 길입니다. 천지부모에 대한 효도는 나의 생명의 본원에 대한 은혜를 갚는 것이므로 매우 자연 스런 실천 경험으로 나타납니다. 천지부모가 나를 낳아주었지만 기르는 것은 음식입니다. 해월은 밥은 천지의 젖 또는 우주의 정기(精氣)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지자연이 자신의 정기 를 나에게 공급해주므로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식고(食告)입니다. 식고는 반포 의 이치요 은덕을 갚는 도리이니 음식을 대하면 반드시 천지에 고하여 그 은덕을 잊지 않는 것이 근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식고에는 먹는 주체도 하늘이지만 먹는 대상도 하늘의 정기 이기 때문에 해월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이천식천以天食天)’고 표현하였습니다.

해월의 제자인 의암은 성심신(性心身)이 본래의 나라고 했습니다. 의암은 자기 안에 모신 천주를 성품이라 하였고, 자기 안에 모신 우주기운을 마음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성품을 천지.자연. 인간을 만든 근본원리이자 원리원소라고 하여 사람과 한울이 둘이 아님을 말하였습니다.

자유 의지와 다시 개벽

칸트는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칸트의 이율배반 중 세 번째 정립인 인과를 통해 자유의지를 찾아보겠습니다. 원인은 자연적 원인이거나 자유 원인입니다. 자연적 인과는 발생하는 모든 것에 앞서 원인이 뒤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연이어 원인들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완결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연법칙에 따르는 인과성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행하는 원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닌 다른 원인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연법칙에 따라 진행하는 현상 계열을 선행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원인들의 절대적 자발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현상의 계열이 원인들 쪽에서 볼 때 완결될 수 있게 하는 그런 자유원인, 즉 초월적 자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계에는 자연인과만이 아니 라 자유인과도 존재해야 합니다. 바로 절대적 자발성을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칸트는 “목적들의 순서에 있어서 인간은 목적 그 자체라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은 동시에 그 자체 로서 목적이 됨 없이, 결코 누군가의 심지어 신의 한낱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 그러 므로 우리 인격의 인간성은 우리 자신에게 신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덕법칙의 주체요. 그러니까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의 주체며, 이 주체 를 위하여 그리고 그 주체와 일치해서만 도대체가 무엇인가가 신성하다고 말해질 수 있기 때 문이다.”라고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신성한 존재로서 스스로 자유의지를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동학천도교에서는 사람 안에 본래 갖추어진 천덕을 깨달아 남들에게 베풀고 실천하는데 그 요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혼란의 원인을 천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불고천명不顧天命) 사사로운 마음을 따르는 데서(각자위심各自爲心) 찾고 있습니다. 천도는 오직 내 마음이 곧 하늘 마음인 줄 알 때 열리는 경지라 할 것입니다. 먼저 마음을 닦아야 우주만물은 하늘의 베풂(恩德)에 의하여 탄생했고, 유지하다가, 환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천덕(天德)을 안다거나 밝힌다는 것은 하늘이라는 보편성의 이치를 마음으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 하늘기운이 생명전체를 탄생. 유지. 환원시키고 있음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라 할 수 있 습니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뚜렷하게 느 끼는 것까지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의암은 “개벽이란 한울이 떨어지고 땅이 꺼져서 혼돈한 한 덩어리로 모였다가 자. 축 두 조 각으로 나뉨을 의미함인가. 아니다. 개벽이란 부패한 것을 맑고 새롭게, 복잡한 것을 간단하고 깨끗하게 함을 말함이니, 천지만물의 개벽은 공기로써 하고 인생 만사의 개벽은 정신으로써 하나니, 너의 정신이 곧 천지의 공기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칸트와 동학천도교의 자유의지에 대한 실천이 구분되는 점은 동식물과 자연에 대한 덕행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칸트는 동식물과 자연에까지 적용시키지는 않습니다. 반면 천도교는 동식물과 자연에까지 실천이 적용됩니다. 가령 새소리도 하늘을 모시고 있다거나 땅을 어 머니 살처럼 보호하라는 말과 해월의 행위는 실천이 우주적 보편성을 가지는 보편이치이자 보편적 실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천도교의 실천은 개체성간의 상호성이 아니라 모든 개체성을 하나로 관통하는 덕성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까지도 관통하는 덕성이라 하겠습니다. 이를 일러 천덕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천덕을 알게 되면 억지로 설득하거나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은 도덕행을 자율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를 동학천도교는 다시 개벽 또는 지상천국이라 표현합니다.

깨달으면 나와 세상, 내유신령과 외유기화, 이쪽과 저쪽, 옳고 그름, 나와 한울, 나와 스승님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고 의암은 법문을 통해 말합니다.

汝必天爲天者 豈無靈性哉 靈必靈爲靈者 天在何方 汝在何方 求則此也 思則此也 常存不二乎

여필천위천자 기무영성재 영필영위령자 천재하방 여재하방 구즉차야 사즉차야 상존불이호

너는 반드시 한울이 한울된 것이니, 어찌 영성이 없겠느냐. 영은 반드시 영이 영된 것이니, 한울은 어디 있으며 너는 어디 있는가. 구하면 이것이요 생각하면 이것이니, 항상 있어 둘이 아니니라. 布德 五十五(1914)年 四月 二日

1) 최제우, 동경대전 논학문, 1861년 1월

<참고문헌> 『』

이수영, 『순수이성비판강의』 2024

오문환 『동학과 칸트의 도덕론 비교』

라명재 『천도교 경전 공부하기』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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