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수성 최종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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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적 작성일25-09-07 10:51 조회87회 댓글0건본문
《공각기동대》를 통해 본 자기의식
초월적 객관, ‘어떤 것=X’
칸트의 인식론에 따르면, 인간은 ‘현상’으로서만 사물을 인식할 수 있고, 사물 자체, 즉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 여기에서 물자체는 현상체와 별도로 존재하는 사물의 ‘본체’가 아니라, 인간 인식의 한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인 ‘현상계’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인 물자체의 세계, ‘예지계’로 이루어진다. 예지계 역시 세계에 대한 규정적 ‘인식’이 아니라 지성의 한계,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개념이다. 인간은 시공간이라는 감성적 형식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그로 인해 세계는 현상계와 예지계로 분열한다.
지성은 반드시 감성적 직관과 결합하여 인식하지만, 우리는 감성적 직관을 통하지 않은, 즉 경험하지 않은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칸트는 이것을 초월적 객관, ‘어떤 것=X’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직접 주어질 수 없지만,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대상이다. 이것이 곧 물자체의 영역, 예지계이다. 칸트는 예지계는 지성의 인식이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한계 개념으로서만 소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것=X’를 객관적 실재성을 갖는 것으로 보려고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범주가 직관 없이 ‘사고’한 그런 대상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시공간이라는 형식적 제약 아래서 인식되는 현상계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인식 대상 자체의 ‘본모습’과는 무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진정한 나’를 찾곤 하는데, 그 또한 현상으로 인식되는 ‘나’가 아닌 ‘본질적인 나’가 따로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발상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영화 《공각기동대》(1995년)는 ‘어떤 것=X’로서의 ‘나’에 대한 철학적 담론으로 읽힌다.
껍데기 속의 자기의식(Ghost in the Shell)
《공각기동대》는 2029년 가까운 미래를 그리고 있는 공상 과학 영화다. “기업의 네트워크가 별을 뒤덮고 전자와 빛이 온 누리를 누비지만 국가나 민족이 무의미해질 정도까지는 정보화되어 있지 않은 가까운 미래”. 인간의 두뇌와 신경계가 직접 네트워크와 연결되고, 신체의 많은 부분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으며, 인터넷이 국가ㆍ조직ㆍ개인을 실시간으로 연결하고, 사이버 공간이 현실과 동일한 무게를 가진 그런 사회다. 주인공 쿠사나기는 전신이 거의 100% 사이보그이며, 두뇌 역시 ‘전뇌화(電腦化)’를 통해 뇌신경을 네트워크와 직접 연결할 수 있다. 2025년을 사는 우리에게 《공각기동대》의 사회는 일정 부분 이미 현실이 되었고, 다른 부분도 머지않아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인공지능과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인간’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에 관한 철학적 담론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쿠사나기는 자신은 이미 옛날에 죽었고, 지금의 자신은 전뇌(電腦)와 의체(義體)로 구성된 ‘모의 인격’이 아닌지 의심한다. 더 나아가 애초에 ‘나’라는 존재는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전뇌 자체가 고스트를 낳고 혼을 깃들이는 거라면 그땐 뭘 근거로 나임을 믿어야 할까?” 태어남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다. 과연 나는 인간으로 태어난 적이 있었나? 어쩌면 전뇌화로 누군가의 정보(기억)가 나에게 심겨 있는 것은 아닌가?
영화에는 ‘고스트’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쿠사나기를 ‘인간’으로 거부감 없이 느끼는 이유는 그녀에게 ‘고스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고스트는 단순히 생체적 뇌를 지칭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 개념의 영혼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내적 주체성, 즉 ‘나’라는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칸트가 말하는 ‘초월적 통각’이 아닌가. 수많은 표상들의 잡다 속에서 하나의 동일자로 존재하는 나. 다른 어떤 표상으로부터도 이끌어낼 수 없는 자기의식. 칸트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에서 생각하는 주체가 익명적이라고 비판한다. 칸트에게 있어선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나의 표상(생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표상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면 그것은 경험적 인식으로 전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통각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인식의 전제 조건이다. 즉 통각은 자아 동일성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조건을 말한다. 그러나 전신이 사이보그이고, 의식이 네트워크에 직접 연결될 때 내 안의 ‘나’가 어디까지인지, 무엇으로 나의 동일성을 보장할 수 있는지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것이 쿠사나기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유다.
자기의식의 두 관점
《공각기동대》에서 또 다른 중요한 존재는 ‘인형사’다. 정치적 공작을 위해 만든 자율형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네트워크 속을 떠도는 순수한 정보 존재다. 그런 그가 ‘자기의식’을 가지며 자신을 ‘생명체’라고 주장한다.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체라고. 그는 종(種)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을 지니고, 인간은 기억 때문에 개인으로 성립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기억으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여기서 기억은 초월적 통각에 의해 경험적 인식으로 전환된 표상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개인이 그 변화 속에서도 자기 동일성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 기억의 연속성 때문이다.
영화 초반에 기억이 조작된 청소부가 등장한다. 그 장면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기억이 조작되자 감각마저 조작된다는 것이다. 개를 데리고 가는 여인이 함께 찍힌 독사진을 그는 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으로 본다. 인식의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왜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이 설령 조작된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청소부는 그 조작된 기억을 실제 경험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가 그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의식’, 즉 초월적 통각이 작용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객관이자 ‘대상=X’이고, ‘현상’이 아닌가? 그것이 곧 청소부의 ‘세계’가 아닌가?
우리는 관객으로서 청소부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청소부는 자신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의 기억이 전뇌 해킹으로 조작되었다면, 조작된 기억이 그 자신의 기억이 된다. 이전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자신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텐데, 이미 비교할 수 있는 기억이 사라진 상태에서 조작된 기억을 지닌 그가 ‘그’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청소부의 경우를 통해 보면, 자아는 기억에 종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억이 조작 가능하다면, 자아 정체성은 사실상 무의미한 환상일 뿐이다.
인형사의 경우는 어떤가? 인형사는 자기의식이 생기자, 자신이 생명체임을 주장한다. 그는 인간만이 자아를 가질 수 있다는 전제를 무너뜨리는 대신, 자기의식은 생명체의 고유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몸 없이 자기의식의 존재만으로 생명체라고 할 수 있다면, 이는 의식이 곧 생명체에게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거나 본질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몸이 없는 인형사는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할까? 분명 지성이 감성적 직관과 결합하는 구조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할 것이다. 앞서 물자체의 영역인 예지계가 생기는 이유는 인간의 인식이 감성적 형식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인형사의 인식 구조가 감성적 형식을 통하지 않는다면 예지계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직관을 통하지 않고 사고 자체에 질료가 주어진다는 것은 통각과 범주에 의한 종합 기능이 따로 필요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인형사에게 생겨난 자기의식, 자아의 동일성은 사실 질료 자체와 구분되지 않는다. 이런 인식하에서도 자아의 정체성은 무의미하다. 자아 정체성이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기준이라면, 질료 자체와 구분되지 않는 자아는 세계 자체이기 때문이다.
예지계 안에서의 자기의식
의체와 전뇌화된 두뇌를 가지고 있는 쿠사나기는 두 가지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첫째는 칸트의 주장대로 감성적 형식과 지성 범주의 종합을 통한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다이브(dive)’ 방식이다. 이것은 의식적ㆍ정신적 이동을 의미하는데, 인간 의식이 네트워크 안으로 직접 이동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전뇌화된 인간의 의식으로도 이동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질료가 사고 자체에 주어지는 것과 같다. 쿠사나기가 의식과 의식, 의식과 정보 사이를 직접 다이빙해 들어가 인식할 수 있음에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은 자아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존재의 개별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각, 기억, 성격, 몸 등으로 드러나는 변화하는 경험적 자아 속에서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 인형사는 자신을 포함한 방대한 네트워크와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을 부분으로 품고 있는 전체의 집합이다. 전체와 분리될 수 없는 자기의식은 경험적이고 개별적인 자아 정체성을 추구하는 대신 변화와 진화를 원한다. 인형사는 어떤 의미로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 인형사가 쿠사나기와의 완전한 융합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되고자 한다.
인형사와 융합한 이후 새로운 몸을 갖게 된 쿠사나기는 동료 바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는 인형사로 불렸던 프로그램도 소령이라 불렸던 여자도 없어.” 그 말은 인간을 초월한(transcendent) 신적 지성으로서의 자기의식도 아니고, 인간적 한계 안에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통각도 아닌, 개별적 조건을 초월한(transcendental) 새로운 ‘주체’로서의 자기의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현상계적 자아(경험적 자아)에서 예지계적 자아(초월적 자아)로의 도약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지계는 인식의 한계를 표현하는 개념이지만, 인식의 불완전성만을 강조하는 개념은 아니다. 자유와 윤리적 실천이 예지계의 영역에서 발생하듯이 자기의식도 예지계의 영역에서 비로소 현상계의 한계에서 벗어나 초월적 통각이 확장된다.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와 인형사를 보건대 우리 인간은 설사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해도 인식의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 남고 싶어 할 것 같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되는 자기의식을 통해 매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더 근사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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