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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의 질문들] 7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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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5-06-14 08:55 조회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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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을 미워하지 않고 다정하며, 자비롭고 내 것이라는 생각 없으며, 내가 했다는 생각 없이 기쁨과 괴로움을 같이 대하며 인내하는 자. 항상 만족할 줄 알고 요가를 알며 자신을 다스리는 자, 결심이 단단 하고 마음과 정신이 언제나 나를 향해 있으며 박띠로 나를 대하는 자.

그는 내게 소중한 자이다

세상이 그로 인해 동요하지 않고 그가 세상으로 인해 동요되지 않으며 기쁨과 참지 못함과 두려움과 조바심에서 벗어난 자, 그는 내게 소 중한 자이다.

치우침 없고 순수하며 영리하고 중심 있는 자, 근심 없고 만사를 내려놓고 박띠로 나를 대하는 자, 그는 내게 소중한 자이다.

들뜨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슬퍼하지 않고 애태우지 않는 자, 깨 끗하고 더러운 것을 내려놓고 다름 아닌 박띠로 나를 대하는 자. 그는 내게 소중하느니."(바가와드 기따 · 박경숙 · 새물결 · 2022년 p177)

 

바가바드 기타의 이 구절들을 읽으며, 나는 하나를 통과하게 이른다. 크리슈나가 말하는 “내 것이라는 생각 없으며, 내가 했다는 생각 없이”라는 구절이 역설적으로 주체적인 선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 비극이 보여주는 윤리적 태도와 맞닿아 있다.

오이디푸스를 다시 살펴보자. 그가 스스로 눈을 찌른 것은 신의 벌도, 사회적 처벌도 아니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그런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진실을 안 후 자신의 윤리적 판단에 따라 그 행위를 ‘선택’했다. 운명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운명을 자신의 의지로 완성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설을 발견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능동적인 주체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안티고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의 죽음은 크레온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말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내적 확신에 따라 그 길을 택했다. 이는 사회적 도덕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윤리적 명령에 대한 순종이었다. 그것도 누군가가 지시한 순종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은 순종이었다.

흥미롭게도 안티고네는 크레온과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입장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당신의 법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고 “나에게는 다른 법이 있다”고 말한다. 왕의 다르마와 누이의 다르마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의 길을 택하되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는 타협이 아니라 치열한 대결이지만, 그 대결 속에도 상대에 대한 인정이 깔려 있다.

여기서 바가바드 기타의 “박띠로 나를 대하는 자”라는 표현이 의미를 갖는다. 박띠는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깨달음에 기반한 헌신이다. 안티고네의 신에 대한 복종도, 오이디푸스의 진실에 대한 복종도 모두 이런 성격을 띤다. 그들은 외부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 확신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원했다’.

이것이야말로 다르마의 실현이다. 다르마는 외부에서 주어진 규칙이 아니라, 존재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필연성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하나의 연결고리를 발견한다.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가 보여준 ‘각자의 길에 대한 확신’과 ‘타인의 길에 대한 이해’라는 이중적 태도가 인도 사회의 종교적 관용과 닿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도 역시 종교 갈등의 역사를 갖고 있고, 현재도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힌두교의 철학에는 “진리는 하나이지만 그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개”라는 인식이 뿌리박혀 있다. 각자의 다르마, 즉 각자의 윤리적 길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내 것이라는 생각 없으며”라는 것은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뜻이지, 주체성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주체성은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그리고 자신의 길에 대한 집착을 넘어선 지점에서 발현된다.

그렇다면 윤리는 왜 필요한가. 생존을 위해서 윤리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변을 보더라도 윤리 없이 사는 삶이 더 좋아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가 보여주는 것은 윤리가 생존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완성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답게 존재하기 위해서 그 선택을 했다.

윤리 없는 삶이 때로 더 편해 보이는 이유는 당장의 고통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괴리를 낳는다.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불행이다. 반면 윤리적 삶은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기 자신과의 일치를 가능케 한다.

오이디푸스는 눈을 잃었지만 진정한 시력을 얻었고, 안티고네는 목숨을 잃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적 진실이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운명의 창조자가 되었다.

“기쁨과 괴로움을 같이 대하며 인내하는 자”라는 기타의 구절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자신의 내적 확신에 따라 행동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진정한 윤리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안티고네이고 오이디푸스다. 매 순간 자신의 윤리적 확신에 따라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를 일상에서 구현하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예를 들어 직장에서 동료와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났을 때를 생각해보자. 상대방의 방식을 완전히 틀렸다고 단정하는 대신, “나에게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태도로 접근하는 것.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신념이 그에게는 진실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바가바드 기타와 그리스 비극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윤리적 성숙의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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