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언스talk s2-6 과거, 현재, 미래는 착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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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비 작성일24-11-14 06:37 조회53회 댓글0건본문
언어의 길을 끊는다
우리의 일상은 시간이라는 틀 안에 너무나도 깊이 갇혀 있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은 언제나 인생의 지침처럼 여겨지지만, 과연 현재라는 것이 존재할까? 시간은 직선일까, 아니면 그저 사건들이 서로 얽힌 하나의 그물망에 불과한 걸까? 이번 강의에서 우리는 철학적 시선으로 과학을 바라보며,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다루어 보았다.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시간과 존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준다. 이 세계에서는 "존재"가 아닌 "사건," 고정된 "사물"이 아닌 "변화"가 중심에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과정'으로서 지속되는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현재"라는 것은 사실 착시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번 주 강의는 단순히 과학적 이론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철학적 언어로 과학적 개념을 풀어낸다. 과학이 다루는 세계는 존재가 아닌 "사건"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입자, 물질, 고정된 실체로 이해하지만, 양자역학은 사건과 관계의 네트워크가 실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여기서 사건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현현(顯現)하는 것이다. “존재가 아닌 변화다,” “사물이 아닌 사건이다”라는 문구는 이러한 인식을 잘 나타낸다. 존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가 지속되고, 사건이 일어나며, 그로 인해 실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이 바라보는 시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다.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관찰자와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과거, 현재, 미래를 직선 상에 놓고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다. 양자 세계에서는 이러한 선형성이 사라진다. 입자들이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사건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시간'은 우리에게 익숙한 방향성을 잃는다. 시간은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사건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임시적 구성물이다. 이러한 개념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구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과거, 현재, 미래는 착시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언어의 길을 끊는다'는 표현이 있다. 이는 언어가 세상을 고정된 실체로 만드는 과정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뜻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과거형, 현재형, 미래형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구분은 우리 삶을 특정한 시간적 실체로 고정하는 데 일조한다. 청년은 청년으로, 중년은 중년으로, 노년은 노년으로 고정된다. 이러한 실체화된 시간 인식은 우리의 삶을 제약하고, 각 단계마다 고유한 역할과 의미를 부여하며 그 역할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강박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양자 세계에서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가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는 결국 고정된 '존재'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하게 만든다. 우리는 시간에 구속된 실체가 아니라, 사건과 관계의 연속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그의 평생 친구 베소는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삶을 살았다. 베소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아인슈타인도 죽음을 맞이하며 말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착시에 불과하다.” 이 말 속에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사건'과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존재를 바라본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삶과 죽음조차도 사건의 연속이며 그 자체로 고정되지 않은 한순간일 뿐이다. 시간의 직선 위에 놓인 시작과 끝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에서 다음 사건으로 이어지는 관계의 흐름일 뿐인 것이다.
이 강의에서 다룬 또 다른 흥미로운 개념은 닫힌 계와 열린 계의 차이이다. 우리는 대개 삶을 고립된 '닫힌 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양자역학에서는 삶을 '열린 계'로 바라본다. 이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삶이란 고립된 질서가 아닌, 끊임없이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사건들의 연속이며, 그 과정에서 특별한 질서가 나타난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가 미리 정해놓은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무질서 속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삶과 죽음을 나누는 고립된 경계는 없다.
우리는 시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젊은 시절에는 시간에 쫓기며 살고, 나이가 들어서는 시간이 끝날까 걱정한다. 하지만 사건과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간다면,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나 삶의 다양한 순간들에 집중할 수 있다. 젊음, 중년, 노년이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모든 순간을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삶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지고,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균질하게 흐르는 시간은 없다
"우리가 닫힌 계냐, 열린 계냐"라는 질문은 간단해 보이지만, 본질을 들여다보면 그리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완전히 열려 있는 상태라면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특정한 질서나 구조, 즉 세상에 드러나는 일정한 패턴이나 형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만약 모든 것이 무한히 열려 있다면, 우리가 속한 세상에 어떤 구분도 없고, 어떤 형태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패턴과 형태가 분명히 존재하며, 이는 우리가 완전히 열린 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히 고립된, 외부와 상호작용이 없는 닫힌 계에 존재한다고도 할 수 없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 속에 놓이지 않는 중간 지점에 우리가 속해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과연 우리는 완전히 살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 몸의 세포들은 매 순간 조금씩 소멸하고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화가 진행되며 생명은 점차 사그라들고 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존재한다. 결국 살아 있음과 죽어감은 서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동시에 공존하는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한 지점에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하고 이동하는 과정 그 자체로서의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존재란 완전한 고정이나 불변이 아니라, 끝없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 역시 이러한 복잡한 본질을 가진다. 현대에서 우리가 시간에 대해 가지는 절대적이고 균질한 개념은 사실 뉴턴 이후로 형성된 관념이다. 뉴턴의 영향으로 시간은 어디서든 동일하게 흐르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를 통해 시공간은 독립적인 틀이나 상자처럼 존재하며, 모든 존재가 그 틀 안에서 각자의 변화를 겪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즉, 사건이나 변화가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시공간이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며, 그 안에 모든 것이 펼쳐진다고 보는 방식이다. 이것이 근대 이후로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다.
하지만 이 절대적인 시공간의 개념은 근대적인 산물일 뿐이다. 고대에는 시간과 공간을 절대적인 실체로 보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은 독립된 틀이 아니라, 사건의 순서와 사물의 배치를 통해 만들어지는 개념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해가 뜨고 지는 순서나 계절의 변화 같은 사건들이 시간이었고, 산과 강이 자리 잡고 나무가 자라는 위치 같은 것들이 공간을 의미했다. 시간 그 자체나 공간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이 연결된 흐름과 사물들이 놓인 배치가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즉 그 균질하고 변함없이 흐르는 시간이라는 개념은 사실 매우 추상적인 관념이다. ‘똑딱똑딱’하고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은 우리가 관념 속에서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 실제 자연의 흐름과는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옛 사람들은 해시계를 통해 시간을 측정했는데, 해시계는 매일매일 조금씩 다르게 움직인다. 여름에는 낮이 길어지고 겨울에는 짧아지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계절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우리는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 즉 태양의 리듬이나 계절의 변화를 무시한, 마치 절대적이고 균질하게 흐르는 시간이 진짜 시간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동일한 간격으로 흐르는 시간이 시간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관념이 우리에게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시공간의 출렁거림
어느덧 해가 짧아졌다. 여름엔 저녁 8시가 되어도 해가 하늘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6시만 되어도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 벌써 해가 져?” 하고 놀라며, 시간이 어긋났다고 느낀다. 마치 시간이라는 것이 시계에 의해 고정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계가 맞고, 자연의 변화가 틀렸다고 여기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인위적이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계라는 도구는 애초에 우리가 자연을 이해하고 따라잡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였다.
시계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해시계를 기준으로 기계 시계를 맞추었다. 매일 아침, 동이 트는 해의 위치를 기준으로 시간을 다시 조정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왔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여름철의 일광절약시간제가 익숙한 것처럼, 그들에게는 해의 위치에 맞춰 시계를 맞추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시계는 이 같은 관습과 달리, 마치 독립적인 법칙을 따르는 듯하다. 시계는 곧 절대적 시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일상을 계획하고 살아가고 있다.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논의는 뉴턴과 라이프니츠로부터 시작된다. 뉴턴에게 시간은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 모든 변화와 사건이 그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는 우리가 시계를 보고 하루의 일정을 맞추듯이, 절대적 시간 안에 인간의 삶이 들어 있다는 사고이다. 뉴턴의 시간 개념은 수학적 추상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이 동일한 흐름 안에서 진행된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한다. 예컨대, 아침이 오고 밤이 찾아오는 것,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 모두가 절대적 시간의 흐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인 것이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시간의 본질을 다르게 보았다. 그는 시간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건의 순서와 질서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사건의 배치와 변화가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시간이 사건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뉴턴의 절대적 시간 개념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 두 철학적 대립을 통합하고 혁신적으로 확장시킨 인물이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뉴턴의 절대적 시간 개념을 비판하며, 시간과 공간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음을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에게 시공간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에너지가 배치되는 방식에 따라 변형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높은 산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해수면에 가까운 곳에서 시간이 빨리 흐르는 현상을 상대성 이론으로 설명했다. 이는 시공간 자체가 물질의 배치에 따라 출렁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시공간의 이런 출렁임은 중력에 의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단순히 끌어당기는 힘으로 보지 않고, 물질이 시공간을 굽게 만들면서 발생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이를테면, 중력장 속에서 무거운 물체가 있는 곳은 시공간이 더욱 굽어지게 된다. 따라서 물체가 놓인 위치에 따라 시간이 더 빠르게 혹은 느리게 흐르며, 시공간 자체의 모양이 바뀌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시간의 틀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동시성이다. 동시성이란, 두 사건이 같은 시각에 일어났다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두 사건이 동시인지 아닌지는 관찰자의 위치와 속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차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고, 바깥에 서 있는 순이가 양쪽 끝에서 동시에 켜지는 두 전구를 본다고 해보자. 순이에게는 전구 A와 B에서 동시에 빛이 도착한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 중간에 있는 영희에게는 이 빛이 동시에 도착하지 않는다. 기차가 움직이는 동안 전구에서 나오는 빛이 각기 다른 시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결국, 순이와 영희는 같은 사건을 다른 시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시간은 관찰자의 위치와 속도에 따라 다르게 흐르고, 하나의 절대적 시간 개념은 무너진다. 우리는 이를 통해 시간이라는 것이 결코 고정된 틀이 아니며,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경험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뉴턴적 시간 개념에 익숙해져 있다. 절대적이고 균일하게 흐르는 시간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고대 사람들에게 시간은 그런 식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시간은 순환하고 변화하는 자연의 일부였고, 인간의 사고가 아닌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진 개념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이러한 고대적 시간관과 현대적 시간관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시계를 보며 하루를 계획하고, 시간에 쫓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출렁거리는 시공간 속에서 그저 흘러가는 ‘지금’을 느끼는 여유를 가질 때, 우리는 고정된 시간 틀을 벗어나게 된다. 시간은 결코 우리를 가두는 틀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변하는 생생한 감각의 일부다.
동시성의 착각
영희와 순이의 예로 돌아가 보자. 영희가 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상상해보자. 이 전화가 순이에게 닿는 데는 무려 4년이 걸린다. 그렇다면 순이가 이 전화를 받았을 때의 '지금'은 정말 영희의 '지금'과 일치하는가? 만약 우리가 이 상황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면, 마치 두 사람의 현재가 동시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빛이 오가는 속도, 그리고 그 거리가 주는 시간적 간극을 고려하면, 순이가 받은 것은 이미 과거의 영희의 모습이다. 그들의 '지금'은 같지 않다. 순이가 받고 있는 소식은 과거에 영희가 보낸 메시지이며, 따라서 순이의 현재와 영희의 현재는 결코 일치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동시성에 대해 깊은 착각을 하고 있다. 동시성이란 단지 우리의 경험에 의해 구축된, 인간의 주관적 판단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차 안에 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기차 안에서 보는 풍경은 오로지 그 기차의 속도와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기차 안에서는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이 나의 진실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주 안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느끼는 것도 우리가 지구라는 기차 안에서 사는 경험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차 밖에서 보면, 속도와 위치에 따라 모든 것은 전혀 다른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기차 안에서 본 풍경이 전부라고 믿듯,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 역시 내가 속한 시스템, 내가 위치한 시간과 공간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더욱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간극은 더욱 극대화된다. 순이와 영희의 거리, 4광년이라는 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빛이 4년 동안 이동해야 닿을 수 있는 거리라는 사실은 우리의 시간 인식에 큰 충격을 준다. 별빛을 볼 때, 우리는 그 별의 현재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존재했던 별의 모습을 보고 있다. 우리가 '본다'는 행위는 그 순간의 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이동해 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보는 것이다. 보는 순간 우리는 이미 과거로 향하는 타임머신에 탑승한 셈이다.
이제 순이와 영희의 대화를 조금 더 확장해보자. 순이가 영희에게 다시 연락을 하려고 한다면 그 신호가 다시 영희에게 도착하는 데 또 4년이 걸린다. 이번에는 무려 8년이 흐른 뒤에야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현재'라고 여기는 순간에 이미 4년, 8년이라는 시간이 간극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흔히 시간을 직선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순이와 영희의 이야기 속에서는 이 직선이 휘어지고, 서로 다른 시점이 얽히면서 확장되는 '연장된 현재'가 드러난다.
연장된 현재는 무엇일까? 이는 말 그대로 지금의 순간이 단일하게 고정되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서 유동적으로 확장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영희의 과거가 순이에게 도착하는 순간이 순이의 현재라면, 그 현재는 이미 영희에게는 과거이다. 이렇듯 현재란 우리 각자의 위치와 시점에서만 정의되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주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현재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는 자기만의 현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책에서는 이를 '연장된 현재' 혹은 '확장된 현재'라고 부른다. 이러한 개념은 우리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지 지금의 순간을 살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인식이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진 하나의 연장선 속에 있는 셈이다. 매 순간 우리는 과거를 보고 있고, 미래를 예측하며 현재를 만들어가지만, 그것이 진정한 현재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것처럼 앞뒤로 흔들리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은 우리에게 이러한 시간의 불확실성을 계속해서 드러낸다.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왔던 절대적인 현재라는 개념은 사실 환상에 가깝다. 우주적 관점에서는 우리의 현재가 무의미해지며, 우리가 진리라 여겼던 시간 개념은 점점 무너져 간다. 우리의 현재는 마치 내 가까이에 있는 작은 거품과도 같다. 이 거품 속에서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끼지만, 사실 우주는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나의 현재가 우주의 현재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세계관에 커다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가 이 순간을 절대적이라고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작은 거품 안에서 안정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이 순간이 나에게는 유일무이한 현재이며, 나의 모든 존재가 그 안에 깃들어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마음. 그러나 그 믿음은 사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환상에 가깝다. 우리는 나만의 작은 현재 속에서 고립된 채, 스스로의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주를 배우고, 현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일은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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