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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18. 독화살을 뽑아라!-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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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5-11-29 09:46 조회1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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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5-11-28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18. 독화살을 뽑아라! -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롭고 

 

남들’ 속 현대인,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롭고”

자본·상품이 만들어낸 환타지 기준 삼아 ‘타인의 인정’ 갈망
자신의 초라한 현실 확인 ‘결국 혼자다’ 외치며 고립으로 자위
“자신 구하는 건 자신뿐” 전륜성왕 아닌 ‘붓다의 길’ 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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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과 상품이 만들어낸 환상을 해결하는 것은 결국 자신 뿐이다. [AI 생성 이미지]

 

 

망 높은 쎌라 바라문이 붓다를 찾아왔다. 붓다의 ‘황금 같은 피부’를 찬탄하면서 말한다. ‘이렇게 최상의 용모를 지니고서 사문으로 살다니, 사방을 정복하고 전차를 모는 전륜성왕이 되어야 합니다.’ 막 출가한 당시 빔비싸라 왕이 코끼리 부대를 주겠다고 한 건 그래도 이해가 된다. 그때 고따마는 수많은 사문 중의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이때는 정각을 이룬 뒤 초전법륜을 마치고 천하를 유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왕의 길’을 권유하고 있다. 전륜성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때 붓다는 어떻게 답했을까? “쎌라여! 나는 왕이라오./위없이 높은 법왕이라오./나는 법으로 수레바퀴를 굴린다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바라문이여! 나는 독화살 뽑아주는 바로 그 위없는 진정한 붓다라오.” (이중표 역주, ‘숫따니빠따’, ‘쎌라-숫따’)

그렇다. 붓다가 전륜성왕을 뛰어넘는 ‘법왕’인 이유는 바로 ‘독화살을 뽑아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독화살이란 무엇인가? ‘슬픔과 갈망과 근심’을 일으키는 것들이다. 그것을 뽑아내야만 ‘슬픔 없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여기까지는 다들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 독화살을 스스로! 뽑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쎌라 바라문처럼 전륜성왕같은 슈퍼맨의 출현을 기다리는 쪽을 선택한다. 허망한 노릇이다. 붓다가 증험했듯이, ‘마음 밖의 구원’은 없다. 전륜성왕의 위력을 압도하는 초고도 기술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을 보라. 독화살을 뽑기는커녕 더 쎈! 독화살을 품고 산다. 하여, ‘슬픔과 갈망과 근심’은 나날이 깊어지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독화살은 무엇일까? 단연 ‘인정욕망’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대부분 ‘남들’로부터 온다. 남들의 시선,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시쳇말로 긁히고 또 긁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타인은 지옥이다’ ‘인간은 결국 혼자다’ 등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정말일까? 그렇다면 1인가구의 시대를 맞이하여 국민건강지수는 한층 높아져야 마땅하다. 그런가? 그렇지 않다. ‘외로움’은 바야흐로 사회적 질병으로 떠오르고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생명은 그 자체로 ‘네트워킹’이다. 굳이 연기법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산다는 건 누군가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같이 먹고 같이 걷는 것임을. 이런 연결 자체가 양생이고 수행이다. 그런 연결망이 사라진다면 삶의 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는가? 온갖 플랫폼이 범람하는 소셜 네트워크 시대 아닌가. 그러면 다시 또 앞의 말들이 반복된다. ‘남들의 시선이 두렵다, 다들 나를 무시한다’ 등등. 뒤집어 보면 이건 결국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의 다른 표현이다. 인정받고 싶은데 도무지 그럴 여지가 없으니 차라리 ‘혼자’를 선택하겠다는 것.

그럼 대체 그 인정의 기준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자본과 상품이 만들어내는 환타지다. 자본은 증식 그 자체를 향해 질주한다. 거기에 도취되면 나 역시 무한질주해야 한다. ‘잠시 멈춤’, ‘찰나의 휴식’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 그런 질주를 통해 어떤 삶이 주어지는가? 상품의 현란한 매트릭스로 진입한다. 명품빽, 외제차, 화려한 인테리어 등등. 이런 것들이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떤 유익함이 있는지 등에 대한 고려는 거의 없다. 단지 그것들이 내뿜는 아우라와 이미지를 과시하고 싶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을 척도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한없이 초라하고 비루해진다. 결국 누군가를 만나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 무너져 있는 셈이다. 이것이 ‘혼자서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외줄타기를 하게 되는 심리적 경로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사항 몇 가지. 모두를 힘들게 하는 그 ‘남들’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혹시 그 ‘남들’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즉 현란한 이미지로 가공된 나의 ‘아바타’가 아닐까. 또 하나. 이 스토리에는 ‘남들의 시선’만 있을 뿐 남들을 보는 ‘자신의 시선’은 빠져 있다. 결국 가해자는 보이지 않고 피해자만 넘쳐나는 형국이다.

또 하나. 보다시피 우리는 그 원인과 증상을 다 진단하고 있다. 자본과 상품의 환타지가 영혼까지 잠식한 탓이라는 것을. 붓다가 말한 독화살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 독화살을 뽑으려 하지 않는가? 혹시 이 모든 것을 ‘한큐’에 해결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바라문들이 전륜성왕을 고대하듯이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실로 허망한 기대다. 자본과 상품의 모든 병리적 증상들을 해결해줄 존재가 등장할 리도 없지만, 그 이전에 ‘자신을 구하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고따마 존자가 ‘왕의 길’이 아닌 ‘붓다의 길’을 간 이유도 거기에 있다.

붓다는 말하신다. ‘일어나 앉아라!’ ‘찰나도 허송 말고’ ‘자신에게 박힌 화살을 뽑아라!’(‘웃따나-숫따’)


출처 :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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