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20.연기법(2) - 무명이 타파되자 빛의 파동이 생성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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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1-12 08:12 조회118회 댓글0건본문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20. 연기법(2) - 무명이 타파되자 빛의 파동이 생성되고
사람 간 연결이 비극적 윤회 끊어내는 최상의 길
계엄 막아낸 저항의 빛, 탐진치 덩어리 부순 생명의 약동
개인주의 상징 MZ, K팝·어울림 경쾌한 스텝으로 부조리 타파
폭력에 맞서 싸우지 않고 폭력 기반 자체 와해시킨 눈부신 성취

‘눈먼 자’는 이분법에 사로잡혀 적대감의 미망에 빠지지만 ‘빛을 보는 참사람’은 이분법과 적대감의 근거를 해체한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1980년대에 널리 유행한 철학적 아포리즘이다. 12·3 비상계엄 이후 이 문장을 떠올린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5·18 같은 국가폭력은 종언을 고했다고 믿었는데 웬 계엄? 그 지독한 ‘부조리함’에서 사건의 ‘희극적’ 변주를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또한 감상적 회고에 불과했다. 언뜻 블랙코미디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 담긴 폭력의 기획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체포, 구금, 암살, 나아가 남북 간 교전까지. 어설픈 시나리오 뒤에 ‘폭군의 광기’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든다면 대체 어떤 미학적 터치로 묘사하게 될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12·3을 통해 풍자와 스릴러, 해학과 비장 사이를 요동치는, 전대미문의 정염과 미학을 경험한 셈이다. 허나 그 혼돈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사람들은 즉각 움직였다. 곧바로 국회로 달려갔고, 즉각 계엄을 해제시켰다. 폭력이 탐진치의 어둠에 갇혀 ‘갈지자’ 행보를 보였다면, 저항의 스텝은 더할 나위 없이 경쾌했다. 어둠을 타파하는 한 줄기 빛이 그런 것처럼!
“괴로움은 조작하는 행위에 의지하고 있다. / 이러한 위험을 알아차리고 / 일체의 조작하는 행위 그치고 / 관념[想]을 없애면 괴로움이 소멸한다. / 이것을 사실 그대로 알고//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아는 / 지혜에 통달한 현자들은 / 마라의 속박을 벗어나 / 이후의 존재로 가지 않는다.”(이중표 역주, ‘숫따니빠따’)
계엄은 ‘조작된 행위’의 극치였다. 최소한의 명분도 근거도 없었다! 어떤 담론으로도 해석 불가능한 건 그 때문이다. 이럴 땐 그냥 ‘업장’이라고 봐야 한다. “존재에 대한 탐욕에 정복되고 / 존재의 거센 강물을 따”른다는 게 이런 것일 터, 당연히 무겁고 탁하다. 그에 반해 해제와 탄핵, 또 파면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빛의 속도로 진행되었다. 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아는 / 지혜”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전자가 고성제에서 집성제로 이어지는 유전연기라면, 후자는 멸성제에서 도성제로 이어지는 환멸연기에 해당한다. 전자가 탐진치의 덩어리로 이루어졌다면, 후자는 그 덩어리를 산산이 부숴버리는 파동의 흐름이었다. 전자가 죽음충동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생명의 약동 그 자체다.
“건강은 번뇌의 소멸에서 온다. / 이러한 사실을 바르게 알고 / 가르침을 확립하고 사려 깊게 행동하는 / 지혜로운 사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번뇌가 소멸되면 생명력이 분출한다. 생명의 파동이 곧 지혜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들을 생성시킨다. 순식간에 광장이 열렸고, 그 무대에선 분노와 유머가 매끄럽게 유동하는 대향연이 펼쳐졌다.
입자가 모든 것을 분절한다면, 파동은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다 연결한다. 여의도와 남태령, 광화문 광장이 바로 그랬다. 개인주의의 상징이었던 MZ세대의 돌연한 등장에서 세대, 성별, 장애인, 직업군 등을 가로지르는 차별금지의 외침, K-팝과 저항가요의 신명 나는 어울림에 이르기까지. 계엄이 우리의 이성과 추론을 붕괴시켰다면, 광장은 그 부조리함을 박살 내는 ‘상상력의 혁명’이었다. 깃발들은 정말 기발했다. ‘전국누워있기연합’, ‘푸바오를 사랑하는 사람들’, ‘냥이들의 집사들 모임’ 등등.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탕수육은 찍먹이지 모임’이었다. 세상에나! 인류 역사상 이런 깃발들이 광장을 점령한 적이 있었던가? 눈보라 치는 겨울밤을 은박지로 버틴 ‘키세스단’은 또 어떤가? 놀랍게도 그들은 활짝! 웃고 있었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욕망의 흐름을 대체 어떤 힘과 권력이 제압하고 통제할 수 있으랴.
“뒤덮인 자에게 어둠이 있다. 눈먼 자는 보지 못한다. / 빛이 있으면 볼 수 있듯이 참사람에게는 열려 있다. / 법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둠과 빛, 입자와 파동은 본디 둘이 아니다. 하지만 ‘눈먼 자’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해서 더더욱 이분법에 사로잡혀 적대감의 미망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빛을 보는 참사람’들은 오히려 그 반대다. 이분법과 적대감의 근거 자체를 해체해 버린다.
12·3 그날 밤을 환기해 보라. 시민들은 달리고 또 달렸다. 군인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들은 적이 아니라 자식이며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폭력과 맞서 싸운 것이 아니라 폭력 자체의 기반을 와해시킨 것이다. 이것이 파동의 역학이다. 이후 파면까지 가는 여정 역시 실로 다이내믹했다.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모든 이항대립을 낡고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가히 환멸연기의 ‘대서사시’라 할 만하다. 그 격정의 파도 속에서도 생명과 평화의 리듬을 지켜낸 것, 그것이야말로 이 서사시가 도달한 눈부신 성취다.
그럼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다르마는 무엇일까? 광장의 파토스를 일상의 연결망으로 변주해 내는 것. 마음과 마음,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만이 12·3 같은 ‘희비극적 카오스’의 윤회를 끊어버릴 수 있는 최상의 길이기도 하다. 2026년 새해가 밝았다.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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