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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21. 죽음, 자유를 향한 또 한 번의 도약 - 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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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1-24 10:53 조회1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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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6-01-23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21. 죽음, 자유를 향한 또 한 번의 도약 - Memento Mori!

 

 

죽음은 위대한 스승이자 좋은 길벗

어떤 예외 없는 '절대적 평등'의 세계··· 아는만큼 삶 충만해져
여래십호 '선서'는 죽음을 기쁨과 행복의 길로 바꾸었다는 뜻
삶의 방향·가치·원동력의 근원··· 독화살 뽑으려면 탐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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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독화살을 뽑기 위해선 죽음을 탐구하는 것 외엔 달리 길이 없다. 죽음을 아는 만큼 삶은 충만해지고, 죽음은 ‘자유를 향한 또 한 번의 도약’이 된다. [AI생성이미지]

 

티베트어로 중생은 ‘도와( 가는 자)’다. 이 낱말을 배울 때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가는 자’라는 게 무슨 뜻일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하염없이 가고 있다는 뜻이다. 길을 모르니 막막하기 그지없어 때론 어이없는 목표를 설정해 놓고 미친 듯이 달려간다. 달려가 잡았는가 싶으면 다시 꿈처럼 아득해진다. 해서 또 길을 잃고 헤매다 어디론가 가고 또 간다. 하지만 결국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이다. ‘죽음을 향해 그토록 열심히 달렸다’는 뜻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허무의 늪에 빠지고 만다. 방황과 허무의 무한궤도! 그것이 윤회이리라. 

이 궤도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죽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젊은 사람도 늙은 사람도/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모두가 죽음의 지배를 받는다./모두가 결국은 죽음에 이른다.// 태어나서 죽지 않을 방법은 없다./늙으면 반드시 죽는 것이/살아 있는 것들의 정해진 법이다.'(이중표 역주, ‘숫따니빠따’)

이렇듯, 죽음 앞에선 어떤 예외도 없다. 죽음은 빈/부, 미/추, 시/비, 선/악 등의 기준이 통하지 않는 ‘절대적 평등’의 세계다. 그런데 왜 두려울까? 이토록 자명한 진리인데 말이다. 해서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정말 알고 있는가? 안다면 이렇듯 부질없이 생을 낭비할 수 있을까? 그렇다. 결국 우리는 죽음을 모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애써 외면하거나 아주 먼 미래의 일로 던져 버린다. 그래서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설령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알지 못한다. 죽음의 때와 형식에 대한 주도권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늘 두려움과 불안에 떤다. ‘익어서 떨어지는 과일에는/떨어지는 두려움이 있듯이/태어나서 죽어가는 인간에게는/언제나 죽음의 공포가 있다.’ 
그뿐인가. 죽음은 오로지 홀로 감당해야 한다. 돈도 권세도, 그 어떤 열렬한 사랑조차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패배한 사람들이/저세상으로 갈 때/아버지도 아들을 구하지 못하고/친척도 다른 친척 구하지 못한다.//보라! 친척들이/통곡하면서 보는 가운데/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제각기 혼자서 죽음에 끌려간다.’

하여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비탄과 슬픔뿐이다. 하지만 울고 슬퍼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효과도 없다. 오히려 ‘괴로움은 더 생기고/몸만 상할 뿐이다.’ ‘스스로 자신을 해치면/(몸은) 마르고 (얼굴은) 창백해진다./그런다고 망자가 살아오지 않나니/울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더 끔찍한 건 슬픔이 생을 잠식하여 번뇌의 늪에 ‘빠져드는’ 것이다. ‘슬픔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은/더욱 큰 괴로움에 빠져든다./죽은 자를 붙들고 통곡하면/슬픔에 정복당하게 된다.’ 그때부터 망자와의 인연은 악연이 된다. 서로가 서로를 슬프게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이제 다시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를 부르짖지만 그거야말로 윤회의 씨앗이 될 뿐이다. 붓다가 말한 독화살 중의 독화살이다.

독화살은 마땅히 뽑아야 한다. 어떻게? 죽음을 탐구하는 것 외엔 달리 길이 없다. 죽음이 무엇인지, 삶과 죽음은 어떻게 공존하는지, 죽음 이후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등등. 생각해 보라. 만약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더더욱 정처 없이 떠돌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또 거기로! 역설적이게도 삶의 방향과 가치, 그리고 원동력은 죽음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죽음을 아는 만큼 삶은 충만해진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위대한 스승이자 좋은 길벗이다.
‘집에 불이 나면 물로 불을 끄듯이/신념 있고 현명하고 지혜 갖춘 현자는/바람이 솜털을 날려 버리듯/일어난 슬픔을 재빨리 털어낸다.//독화살을 뽑고 집착하지 않고/마음의 평온을 얻어야 한다./일체의 슬픔을 뛰어넘으면/슬픔 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붓다의 10가지 명호 가운데 하나가 ‘선서(善逝)’다. ‘잘 가신 분’이라는 뜻이다. 죽음을 슬픔과 비탄이 아닌 기쁨과 행복의 길로 바꾸었다는 뜻이다. 그 길을 닦아 간다면 열반은 아니더라도 죽음을 ‘자유를 향한 또 한 번의 도약’으로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100세 시대가 도래하였다. 아울러 60세 이상 인구가 천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게다가 인공지능은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무시로 쏟아내고 있다. 죽음의 이치를 터득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대는 없으리라. 하여, 지금의 노년 세대에게는 죽음의 새로운 형식을 다음 세대에 전할 다르마가 주어진 셈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붓다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감히 알려고 하라! 죽음에 대하여! 생사가 하나 되는 그 오묘한 이치에 대하여!

이미 새해가 밝았지만, 아직 병오년은 아니다. 2월 4일 입춘이 되어야 비로소 병오년의 운기가 시작된다. 지금은 을사년의 끄트머리다. 동트기 전의 깊은 어둠, 죽음의 지혜로 삶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다.

 

 

출처 :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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