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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24. 피안으로 가는 길 - 과거도 미래도 없이!(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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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3-13 10:53 조회1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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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6-03-13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24. 피안으로 가는 길 - 과거도 미래도 없이!(끝)

 

 


"오직 '지금 여기'를 직시하고 향유하라"

열반·공, 허무주의 아니고 현실 떨어진 이상향과 달라
탐진치 원천은 언어
··· 명칭·분별 사라진 곳이 피안 가는 길
지난 것·오지 않은 것에 대한 집착·기대 사라진 자리가 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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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설파하는피안은 일종의 지평선이다. 지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자체가피안에 이르는 이다. [AI생성이미지]

 


드디어 마지막 회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아득했는데 무사히 완주하게 되어 참 다행이다. 첫 회의 타이틀은 ‘길의 정복자’, 마지막은 ‘피안으로 가는 길’이다. 나름 수미쌍관의 형식을 취한 셈이다.

‘숫따니빠따’의 마지막 챕터 5장은 모두 18개의 ‘게송 묶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지막 18번째 묶음이 ‘빠라야나-피안으로 가는 길’이다. 피날레에 걸맞은 배치라 하겠다. ‘숫따니빠따’는 ‘뱀의 경’, ‘다니야의 경’, ‘무소의 뿔의 경’ 등이 널리 회자되고 있지만 그 명성에 가려서인지 마지막 장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무려 16명의 바라문 청년과 청년 붓다의 대화로 이루어진 이 장은 그 설정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연재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이 장을 대충 지나쳤을 것이다. 연재라는 ‘인연장’에 감사드린다.

마지막 5장을 다시 정리하면, 바라문 청년 16명이 붓다를 찾아갔다. 이들은 붓다에게 ‘훌륭한’ 질문을 했고, 붓다는 ‘사실대로’ 답했다. 청년들은 이 경이로운 마주침을 이렇게 정리했다. “각각의 물음에 대해 붓다가 / 가르친 그대로 따른다면 / 누구나 차안에서 / 피안으로 간다네.”, “차안에서 피안으로 가려면 / 최상의 길을 수행해야 한다네.” 그들은 붓다의 ‘광대한 지혜’와 ‘광대한 지식’을 찬양해 마지않는다.

“사방과 그 사이의 사방 / 상방과 하방 이들 시방세계에서 /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 알지 못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이중표 역주, ‘숫따니빠따’)
‘시방삼세’를 꿰뚫는 ‘일체지자’라는 뜻이다. 그럼 붓다는 어떻게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청년들의 판단은 이러했다. “이전에 제가 들었던 대답은 / ‘이랬다고 하더라. 이렇게 된다더라.’ / 모두가 이렇게 전해 들은 말이었고 / 그 말은 모두가 의혹만 키웠습니다.” 즉, 다른 수행자들은 다들 ‘간접화법’으로 말했지만, 오직 붓다만이 권위, 전통, 계율과 의례 등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체험적 지혜’로써 설했다는 것. 불교와 외도 사이의 차이를 예리하게 간파한 것이다. 청년들의 안목이 청정해질수록 붓다의 설법 역시 한층 고양되었다.

“자아가 있다고 짐작하지 말고 / 항상 주의 집중하여 세간을 공성(空性)으로 보아라! / 이와 같이 하면 죽음을 벗어난 사람이 될 것이다.”

‘무아’를 넘어 ‘공성’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한다. ‘공(空)’은 훗날 대승불교의 키워드가 되지만, 여기서 보듯 이미 초기부터 그 씨앗이 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에 부응하여 청년들의 질문 역시 한층 심오해진다. “(번뇌가) 식어버린 해탈자 / 그와 같은 사람에 대한 분별이 있나요?” “열반으로 돌아간 그는 존재하지 않나요? / 그렇지 않으면 건강하게 영원히 존재하나요?”

붓다의 답변은? “개념체계에서 해탈한 성자는 / 대상이 사라져서 명칭을 붙일 수 없다.” 즉, “열반으로 돌아간 자에게는 서술할 말이 없다”, “일체의 법이 제거되면 모든 말길[言路]도 제거된다.” 언어도단의 경지라는 것. 그렇다. 우리의 모든 표상은 언어의 그물망 안에 있다. 탐진치의 원천 역시 거기에 있다. 따라서 해탈과 열반, 무아와 공성은 이 그물망으로부터의 탈주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피안으로 가는 길’은 언어가 끊어진 백척간두에 서는 일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 같은 중생은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럴 때 되새겨야 할 것이 바로 ‘초발심’이다. 다시 말해 이 문답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환기해야 한다. 처음 질문은 ‘참된 행복이란 무엇인가?’였다. 붓다가 성을 나와 숲으로 간 이유도 마찬가지다. 생사의 ‘거센 강’을 건너 슬픔과 비탄을 정복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열반이나 공성은 결코 니힐리즘(허무주의)을 향하지 않는다. 초월적 이상향은 더더욱 아니다. 슬픔에서 슬픔이 없는 곳으로! 그럼 그것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과거에 있던 것은 말려버리고 / 미래에는 아무것도 없게 하라! / 그 중간에 어떤 것도 붙잡지 않으면 그대는 평화롭게 유행할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라는 것. 왜? 시간의 지속이라는 표상만큼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직 ‘지금 여기’를 직시하고 향유하라! 지나간 것에 대한 집착과 오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 그것들이 사라진 자리가 바로 ‘피안’이다!

그런 점에서 붓다가 설파하는 ‘피안’은 일종의 지평선이다. 지평선은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다만 그곳을 향해 달려갈 뿐! 그 ‘달려감’ 자체가 ‘피안에 이르는 길’일 터, 이것이 ‘숫따니빠따’가 전하는 마지막 ‘굿뉴스’다! 


출처 :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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