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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5. 와서 보라! - 진리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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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5-05-17 13:57 조회1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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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5-05-16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5. 와서 보라! - 진리는 기쁨이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붓다가 제시한 '찐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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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겨울(12.3) 이래 온 국민의 마음이 정치로 쏠리는 바람에 드라마가 일상에서 증발해 버렸다. 현실이 드라마를 압도한 탓이리라. 그 와중에도 화제의 중심이 된 드라마가 있었으니, ‘폭싹 속았수다’가 그것이다. 나 역시 재미있게 봤다. 제목이 워낙 감칠맛이 넘치는 데다 20세기 중후반에 걸친 시대의 풍경들을 음미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제주 해녀의 억새풀같은 인생이 담긴 첫 회에선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한편 그 지독한 고생살이에도 주인공 ‘애순이’와 ‘관식이’가 유채꽃 흐드러진 들판에서 첫 키스를 하는 장면에선 가슴이 한껏 벅차올랐다. 그렇게 세월은 지나 둘은 아이 셋을 키워내고(중간에 막내를 잃었지만), 애순이를 똑 닮은 첫딸 금명이는 서울대를 가고 일본 유학을 간다. 저 정도면 인생역전 아닌가, 싶었는데, 웬일인지 계속 운다. 주연배우 아이유는 엄마와 딸 역할을 동시에 하는 바람에 드라마 내내 울고 또 울어야 했다. 부모는 자식한테 더 해주지 못해 서글프고, 자식은 부모의 희생에 대한 죄책감으로 또 서럽다. 그러다 마침내 바닷가 식당이 대박이 나면서 그 ‘죽일 넘’의 돈도 원없이 벌고 이젠 살만해지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무쇠같은 관식이가 병으로 쓰러진다. 그래서 이번엔 다들 진짜로 펑펑 운다. 그래서 든 의문.

신산하지만 참 아름다운 인생인데 왜 저토록 울어야 할까?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게 왜 꼭 ‘돈’이어야만 할까? 자식도 마찬가지. 부모의 사랑에 대한 보답을 꼭 성공이나 돈으로만 해야하는 걸까? 문득, ‘아, 이것이 윤회의 정체인가?’ 싶었다. 끊임없이 슬픔을 통해 다시 돌아오는 사이, 아무리 아끼고 사랑해도 서로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관계, 그게 윤회라면 해탈은 바로 그런 ‘슬픔의 그물망’에서 벗어나는 것이리라. 슬픔에서 슬픔이 없는 곳으로! 붓다가 세상에 전한 메시지가 바로 그랬다.       

불교에 대한 흔한 편견 가운데 하나가 ‘니힐리즘’이다. 출가, 은둔의 이미지에다 ‘공, 적멸’ 등의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터, 나 또한 막연히 그런 인상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불교에 입문하면서 가장 놀란 것도 이 대목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은둔도 적막도 아닌 삶의 근본적 질문, 즉 번뇌의 한가운데로 돌진하는 것이다. 그 괴로움을 타파해야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이 세상에서 행복을 구하는 데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붓다)

‘숫타니타파’에는 수많은 바라문 청년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붓다를 찾아와 생사의 진리를 묻는다. 윤회의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고 싶은 것이다. 붓다는 다양한 방편을 통해 그 길에 대해 설하신다. 그 다음엔 늘 이런 찬탄이 터져 나온다.

“훌륭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마치 뒤집힌 것을 바로 세우는 것 같고,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 같고,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주는 것 같고, ‘눈 있는 자들은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비춰주는 것 같습니다.”(이중표 역주, ‘숫따니빠따’)  

그렇다. 우리의 사유는 거꾸로! 서 있다. 행복을 추구한다면서 슬픔을 불러오고, 열정을 불태우다 허무에 빠져 허우적댄다. “인생은 한방이다!”고 외치지만 마음은 도무지 정처가 없다. 눈을 크게 뜰수록 어둠이 깊어지고, 불을 밝힐수록 주변이 깜깜해진다. 한마디로 ‘전도망상’이다. 붓다는 그 뒤집힌 세상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와서 믿으라!’가 아니라, ‘와서 보라!’, 보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일지니! 뒤집힌 것이 바로 세워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환희용약한다. 어둠 속을 더듬거리다 눈이 환해지면서 두 발로 당당하게 걷게 되었을 때의 그 해방감, ‘난 누구?’ ‘여긴 어디?’하다가 인생의 지도가 눈앞에 쫙 펼쳐질 때의 그 자유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진리가 빛이라면 빛은 파동이다. 하여 길이 열리면 내 몸의 원자들을 묶고 있는 빛의 파동이 사방으로 방사되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생명의 발로다. 그러니 붓다를 통해 ‘진리를 보고, 얻고, 알고, 깊이 이해하고, 의혹에서 벗어나고 의심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게’(‘디가니까야’) 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또 하나, 수행과 구도는 대개 고행과 억압을 연상시킨다. 모든 것을 버리고 ‘참고 견디는’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하지만 버림으로써 무엇을 얻는지, 견딤으로써 무엇을 누리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거기에는 우리의 통념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초기경전 가운데 ‘우다나’라는 경전이 있다. ‘영탄’이라는 뜻이다. 또 ‘디가니까야’에는 ‘빠싸디까’라는 경이 나온다. ‘상쾌하다, 유쾌하다’는 뜻이다. 그렇다. 붓다에게 있어 진리는 곧 기쁨이다!

올해도 5월의 푸르름과 함께 ‘부처님 오신날’이 돌아왔다. 이 약동하는 봄의 기운과 붓다의 메시지는 참으로 잘 어울린다. ‘애순이’와 ‘관식이’를 비롯하여 모든 중생들이 ‘서러움과 눈물바다’에서 벗어나 ‘찐행복’에 도달하는 길에 대한 ‘굿뉴스!’라는 점에서 말이다.


출처 :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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