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10.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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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5-07-25 20:38 조회159회 댓글0건본문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10.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보라!
사람의 귀천 가르는 기준은 스펙 아닌 행위
신분에 연연하는 바라문에 '행위' 중요성 가르친 붓
자본·스펙 결탁 부추기는 현실, 사회 불평등 심화시켜
'평등·지성' 교육 혁신으로 '불평등 사랑' 오명 벗어야

바라문의 모욕에도 평정을 잃지 않는 붓다. '와쌀라 숫따'는 천함의 기준이 행위임을 밝히며 차별의 본질을 통찰한다. [AI 생성 이미지]
지난해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고 해서 충격을 받았는데, 올해는 한 유튜브에서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을 사랑하는 나라”라는 리포트를 듣고 깜짝 놀랐다. ‘불평등하다’도 아니고 ‘불평등을 사랑’한다니, 이건 대체 무슨 뜻인가? 한국인은 지금의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여기기는커녕 더 큰 격차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이건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거부가 아닌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었는데, 정작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지배와 예속’에 대한 유혹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니! 이건 단순한 ‘세태풍속’이 아니라 ‘병리적 증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불평등’의 척도는 단연 화폐다. 그런데 이 화폐의 차이를 결정하는 최종심급은 학벌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학벌의 각 항목을 채우는 스펙이다. ‘자본과 스펙의 혼연일치’가 일어난 것. ‘7세 고시’ ‘4세 고시’ 같은 흉흉한 소문이 도는 배경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더 참담하다. 민주주의의 기본가치가 구현되어야 할 교육현장이 완전히 자본에 잠식되면서 새로운 카스트를 만들어내는 온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와쌀라 숫따[천한 사람]’를 보면 이런 ‘증상’에 대한 붓다의 처방이 나온다. 한 바라문이 있었다. 이름은 악기까 바라드와자. 그가 집에서 불을 피우고 제사를 올리고 있었는데, 붓다가 싸왓티에서 탁발을 위해 그의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 이렇게 소리친다. “거기 까까머리야! 거기 사문 놈아! 거기 천한 놈아! 거기에 서라!” 당시로선 충분히 있을 법한 반응이다. 카스트의 기준에 따르면 바라문과 탁발승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에 해당하니 말이다.
그러자 ‘탁발승’ 붓다가 물었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천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만드는 행실들을 아는가?” 악기까는 당황했으리라. 귀·천은 혈통에 따라 이미 결정된 것이지 ‘행실’에 따라 구분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저는 모릅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모르는 걸 ‘모른다’ 하는 걸 보면, 나름 괜찮은 바라문이었던 것 같다. 그와 달리, 현대인들은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귀·천을 나누는 기준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고의 스펙을 쌓아 억대 연봉의 전문직을 얻고 그걸 바탕으로 고위 관직에 오르면, 다시 그걸 이용해서 자산을 불려가면 된다. 이 과정 어디에도 ‘행실’ 혹은 그 원천이 되는 ‘인성’에 대한 고려는 없다.
붓다의 기준은 아주 명확하다. “화 잘 내고, 악의 품고”, “현혹하여 남을 속이는” 사람, “마을을 공격하고/도시를 파괴하”는 독재자, “빚진 것이 확실한데/독촉받자 도망가서/빚이 없다 우”기는 채무자들, 이들이 바로 ‘천한 존재’라는 것. 아주 오래 전 이야긴데, 흡사 우리 시대를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예컨대, 툭하면 격노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인들, 빚중독에 빠진 영끌족들. 보이스피싱 혹은 주식 사기꾼들 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최고의 스펙을 자랑한다는 것. 가장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분투했건만, 보라! 그들의 행실은 더할 나위 없이 천하고 비루하다.
붓다가 드는 예시도 비슷하다. “베다를 배우는 가문에 태어나/만트라를 잘 아는 바라문들도” ‘사악한 업’을 짓게 되면 “악취에 떨어지고 비난받는 것/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당시 불가촉천민 마땅가는 천한 백정의 아들이었으나, “많은 바라문과 크샤트리아/그를 예배하려 모여 들었다.” 이유는? “쾌락과 욕망”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고로, 귀·천에 대한 붓다의 결론은 간단하다.
태어날 때 천한 자 없고/태어날 때 바라문 없다./업에 의해 천한 자 되고/업에 의해 바라문 된다.(이중표 역주, ‘숫따니빠따’)
한마디로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업]를 보라’는 것.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 발상이었다. 하지만 이후 역사는 그 방향으로 흘러왔다. 하여, 민주주의는 마침내 ‘자유와 평등’을 절대적 가치로 삼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이것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남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탓이다. 생기부를 사수하고 스펙을 쌓기 위한 온갖 괴담이 횡행하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6개월 동안 충분히 목격하고 말았다. 그 ‘죽일 넘’의 스펙이 얼마나 인격을 파탄 내고 세상을 어지럽히는지를. 그러니 이젠 우리도 붓다의 가르침을 변주하여 이렇게 말해야 한다. “스펙을 묻지 말고 행위를 보라!”
12·3비상계엄 이후 광장은 뜨겁게 연대했다. 국민주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지만 거기에는 모든 차별에 대한 저항의 열기 역시 드높았다. 그 파토스가 일상과 내면에서 구현되어야 할 때다. 무엇보다 교육 현장이 ‘스펙의 늪’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등’, ‘우정과 지성’의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하여 부디 ‘세상에서 가장 불평등을 사랑하는 나라’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출처 :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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