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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13.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다르마와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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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5-09-13 11:41 조회1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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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5-09-12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13.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다르마와 유머

 

"진실하게, 유쾌하게"... 붓다의 언어와 유머

붓다의 32가지 호상은 거짓말 사회를 극복하는 언어 지침
고깔리야 비구 사건은 잘못된 구업의 무서움을 잘 보여줘
입안의 도끼는 악한 말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인과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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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고 유쾌한 붓다의 언어가 연꽃처럼 피어나며 어둠을 헤치고 희망의 길을 열어준다.[AI생성 이미지]

 

부처님의 몸은 32가지 호상이 있다고 한다. 황금빛 피부, 길게 드리운 귀, 사슴같은 장딴지 등등. 몸과 마음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리라. 헌데 그중에서 특히 신기한 것이 하나 있다. 혀가 아주 길다는 것. ‘혀를 내밀어 두 귓구멍을 핥고, 두 콧구멍을 핥고, 앞이마 전체를 혀로 덮’을 정도라고 한다. 대체 무슨 뜻일까?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것. 팔만사천법문에 상응하는 신체적 특징인 셈이다. 불교라고 하면 흔히 ‘언어도단’ ‘어불성설’ 등을 떠올리지만 붓다만큼 언어의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경우는 없다. 하긴 분별망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도 언어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어야 하리라.

붓다의 다르마의 두 축을 ‘지혜와 자비’라 할 때, 자비행의 핵심은 방편이다. 방편이란 무엇인가? 중생의 근기와 인연조건에 맞는 가르침을 펼치는 것이다. 때로 신통력을 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말로 이루어진다. 번뇌의 대부분이 말로 인한 어긋남, 곧 구업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구의’ 삼업을 닦는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언뜻 생각하기론 신(행위)과 의(생각)이면 충분할 거 같은데, 왜 구업을 별도로 설정했을까? 행위 가운데 아주 특별한 행위라는 뜻이다. 인류학적으로 보아도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일렉투스(직립보행)’이자 ‘호모 로퀜스(언어)’다. 말하자면, 두 발로 걷기 위해서는 제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말이 어긋난다는 건 삶에 아주 치명적이다.

붓다 당시에도 그런 사건이 있었다. 고깔리야 비구가 붓다의 상수제자인 “싸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사악한 욕망에 빠졌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붓다는 강하게 질책했다. “싸리뿟따와 목갈라나의 마음을 믿어라! 그들은 올바르다!” 얼마 안 되어 고깔리야 비구의 몸 전체에 겨자씨만한 종기가 났고, 그 종기가 점점 더 커져서 그 병으로 죽고 말았다. 붓다는 말한다.

“사람이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가 생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쁜 말 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찍는다./ 청정한 사람에게 악의를 품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죄가 돌아온다/ 바람을 향해 날린 먼지가 돌아오듯”(이중표 역주, ‘고깔리야 숫따’, ‘숫따니빠따’)

과연 그렇다. 비상계엄 이후 우리는 공직자들의 ‘거짓말 테러’를 당해왔다. 그리고 이제 그 말들은 자신들의 발등을 찍고 있다. ‘바람을 향해 날린 먼지가’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건 단지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 보통사람들의 신경회로에 치명타를 안겨준다. 특히 거짓말에 자주 노출되다 보면 웬만한 거짓말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또는 거기에 질리다 보면 아예 언어 자체에 대한 불신에 빠질 수도 있다. 차라리 침묵을 선택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붓다의 장광설은 우리에게 말한다. 다르마는 언어의 대향연이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거기에 참여할 수 있을까? ‘쑤바씨따-숫따’(훌륭한 말)에 나오는 게송이다.

“진실은 불멸의 언어입니다/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는/ 이런 말을 해야 합니다./ 그 말이 기쁨을 주는/ 유쾌한 말을 해야 합니다.”

불교 수행의 키워드는 ‘자리이타(자신에게도 이롭고 타인에게도 이로운)’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을 ‘괴롭히거나’ 남을 ‘해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게 정말 쉽지 않다. 배려한답시고 하는 말들이 더 큰 오해를 야기하는 일이 다반사다. 어떻게 해야 그런 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먼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아니, 그 전에 ‘진실의 불멸성’을 확신해야 한다. 헌데, 진실이라고 하면 소위 ‘엄근진’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진실은 유쾌한 말이다. 붓다의 장광설은 청산유수다. 질문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주된다. 그 매끄러움이 바로 유쾌함이다.

 그런 점에서 붓다는 수사학의 달인이다. 붓다의 다르마에는 은유와 역설, 그리고 반전이 수시로 일어난다. 따지고 보면 번뇌란 자아와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우리 중생들의 언어는 대체로 부조리하다. 대부분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한 탓이다. 이 덩어리를 해체할 때 유머가 생성되고 웃음이 터져나온다. 당연하다. 깨달음이란 ‘슬픔에서 슬픔이 없는 곳’, 즉 지복의 세계로 가는 것이니 말이다. 하여, 붓다의 설법은 늘 이런 예찬을 듣는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 근사한 표현이다. 고로, 다르마와 유머는 하나다.

이 거울에 비추어보면 우리의 언어생활은 빈곤하기 그지없다. 빈곤하면 비장해지고, 비장하면 무거워진다. 거기가 바로 분노와 적대감의 온상이다. 요즘 만연하고 있는 혐오발언들을 환기해보라. 그리고 그 구업은 고스란히 자신들에게 되돌아온다. 이 불쾌한 수렁에서 벗어나려면 일상의 현장 곳곳에서 언어의 향연을 펼쳐야 한다. 기준은 간단하다. 진실하게 유쾌하게!

출처 :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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