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9. '까씨'와의 대화 - '마음의 밭'을 갈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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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5-07-12 07:54 조회139회 댓글1건본문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9. '까씨'와의 대화
- '마음의 밭'을 갈아라!
마음의 밭 가꾸는 정진의 결실은 지고의 행복
500개의 쟁기로 밭 갈던 까씨 부처님께 "노동하라" 핀잔
"마음 밭 갈아 성불의 씨 뿌린다"는 부처님 가르침에 당황
육체노동 사라진 시대, 몸을 가꾸는 것만으론 행복도 허망

쟁기로 땅을 일구는 바라문과 정진으로 마음을 가꾸는 붓다. 진짜 농사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AI 생성 이미지]
노트북을 켜면 화면에 무시로 등장하는 광고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게임 광고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가장 눈길을 끄는데, 그걸 보고 있노라면 문득 ‘지금이 청동기 시대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같이 근육질 몸매에 파워풀한 육체미가 넘친다. 그들이 든 검과 활, 창을 보건대 치열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이런 트랜드에 부응하듯, 현실에서도 헬스와 성형, 피부미용 등 몸을 단련하는 온갖 프로그램들이 난무한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지금은 디지털, 즉 양자역학의 시대다. 통찰과 교감, 창의성과 연결 등 정신 활동이 만개해야 하는데, 왜 거꾸로 ‘피지컬 신드롬’이 판을 치는 걸까? 단순한 ‘외모지상주의’라고 보기엔 좀 과하다.
‘숫타티파타’에 이와 관련한 문답이 있다. ‘까씨 바라드와자 경’이다. ‘까씨’는 ‘경작’이라는 뜻이고, ‘바라드와자’는 ‘바라문’ 가문의 이름이다. 붓다가 마가다국의 한 마을에 머무실 때 이 바라문 가문에 탁발을 하러 가셨다. 파종기라 500개의 쟁기를 멍에에 묶고 있던 까씨가 붓다에게 충고한다.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사문이여, 그대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리세요. 그대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으세요.”(이중표 역주, ‘숫따니빠따’)
‘빌어먹지’ 말고 직접 노동을 해서 먹고 살라는 것. 20세기에 유행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구호를 연상시킨다. 그에 대한 붓다의 응답.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오.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는다오.” 당황하는 ‘까씨’. 그는 붓다가 ‘농사짓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대체 무슨 말인가?
믿음은 씨앗, 수행은 비/ 통찰지는 나의 멍에와 쟁기/ 온화함은 끌채, 마음은 멍에끈/ 주의집중은 나의 보습과 회초리// 몸가짐 조심하고, 말조심하고/ 음식은 양에 맞게 절제를 하며/ 진리로 잡초를 베어낸다네/온화함은 나의 휴식이라네
씨앗과 멍에, 쟁기와 끌채, 보습과 회초리 등,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모든 도구가 마음 영역에 다 있다. 그게 무엇인가? 믿음, 통찰지, 온화함, 주의 집중 등이다. 붓다는 그것으로 ‘마음의 밭’을 부지런히 갈고 있다는 것. 그것은 대체 어떤 이로움을 가져오는가? 몸과 말을 조심하고, 음식의 양을 절제하고, 지혜로써 마음을 어지럽히는 잡초를 베어내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온화함’이라는 휴식을 얻게 된다. 까씨는 뜨끔했으리라. 자신은 아무리 열심히 경작을 하고 수확을 해도 그런 경지를 누려본 적이 없었으므로. 물론 노동은 그 자체로 신성하다. 먹고 살기 위해선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허나 ‘다니야의 경’이 잘 보여주듯, 노동은 궁극적으로 소유와 증식, 약탈과 착취의 그물망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럼 우리 시대는? 지금은 당연히 농업시대도, 수렵채집 시대도 아니다. 사냥과 전쟁이 주요 산업이었던 청동기 시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이토록 육체미에 열광하는가? 전신의 근육을 다 발굴해내고, 성형은 ‘페이스 오프’에 가까울 정도고, 보디 프로필을 찍는게 ‘인생 미션’이라고 한다. 건강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의 효율을 위해선 더더욱 아니다. 주지하듯, 디지털 문명은 인류를 육체노동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AI 덕분에 전문직들의 정신노동조차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바야흐로 ‘노동의 종말’이 다가오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피지컬 신드롬’은 노동과 전쟁에 대한 아련한 향수인가? 아니면 육체에 대한 맹목적 탐닉인가? 뭐가 됐건 그럴수록 ‘마음의 밭’은 황무지가 되어 간다는 것.
붓다에 따르면, ‘마음의 밭’을 개간하는 것의 이로움은 실로 무궁하다.
지고의 행복을 실어 나르는/ 짐을 진 나의 소는 정진이라네./ 물러서지 않고 나아간다네./ 그가 간 곳에는 걱정이 없다네.
황소를 잘 부리면 밭을 거침없이 개간할 수 있듯이, ‘정진’이라는 미덕을 체득할 수 있다면 진리를 향해 물러섬 없이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 보다시피 육체와 마음은 대칭이 아니다. 둘은 본디 나눌 수 없지만 굳이 나눈다면 ‘마음의 힘’이 훨씬 더 세다. 왜? 마음은 경계가 무량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육체는 너무나 쉽게 부서진다. ‘무상’의 파도를 피할 길이 없다. 따라서 아무리 육체를 ‘절차탁마’해도 ‘지고의 행복’ 따위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끝없는 피로와 슬픔이 있을 뿐!
스마트폰과 공생하는 법을 터득하기도 전에 AI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 현란한 속도 앞에서 다들 어질어질하다. 그에 대한 붓다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몸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마음의 밭’을 갈아라! 이 ‘농사’의 결실은 ‘불사(不死)’, 곧 해탈이다.
출처 :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
댓글목록
제윤지님의 댓글
제윤지 작성일
믿음,통찰지,온화함,주의집중 마음의 밭을 일구는 것이 이로움은 끝이 없군요.
무엇이 안 됐다고 낙심하지 말고 오늘부터라도 마음의 밭을 일구고자 씨앗을 뿌려야겠습니다.
오늘도 말씀과 고견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미숙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