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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죽음 앞에서 울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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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7-26 09:38 조회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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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울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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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인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지금, 여기서 온전히 받아들이기

모든 별이 사라져버린다면
혹은 모두 죽어버린다면
나는 결국 텅 빈 하늘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그 완전한 어둠의 숭고함을 느끼게 되리라
물론, 그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Were all stars to disappear or die,
I should learn to look at an empty sky
And feel its total dark sublime,
Though this might take me a little time.

『Homage to Clio』 (1960)

미국 시인 W. H. Auden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The More Loving One)’에서 노래한 것처럼, 나의 무덤 앞 침묵 또한 쉽게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내의 주검 앞에서 질장구를 친 장자 역시 처음부터 초연했던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그는 슬픔을 겪은 뒤, 생과 사를 기가 모였다 흩어지는 변화의 흐름으로 이해하면서 죽음을 단절이 아닌 순환으로 받아들였다. 그랬더니 울음이 그치더라는 것이다.

내가 장자처럼 죽음을 ‘변화’로 이해하는 일은 이성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의식에 각인된 ‘이동’의 관념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딘가에 여전히 아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 그곳으로 언젠가 다시 닿을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기대. 그것을 버리는 건 마치 인연을 저버리는 것처럼 힘겨운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연 끊기가 고단했으면 누군가는 이를 악연이라고 했을까. 더군다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미뤄볼 때 나는 이 두 감각 사이에서 오랫동안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고 있을 게 뻔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시간이다.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 굳어버리지 않도록 흘려보내는 시간. 그 시간은 어쩌면, 무엇을 더 하려 애쓰기보다 이미 내 안에 올라와 있는 감정들—슬픔이나 그리움, 혹은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들—을 그대로 흘러가게 두는 일일 것 같다. 장자도 시간이 걸릴 거라고 위로를 해주고 있지 않는가.

어떤 일도 긴 시간을 들여야 이루어집니다. 한번 잘못되면 고칠 수 없으니 조급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이 되어 가게 두면서 마음을 놀게 하세요. 피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타고난 마음’을 기르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리저리 너무 많이 따지지 마십시오.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것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낭송 장자』, 장자 지음, 이희경 풀어 읽음, 북드라망, p.55)

장자가 말하는 ‘타고난 마음’이란, 무엇을 애써 만들어내기 이전의 상태, 이미 그렇게 반응하고 느끼고 있는 나의 본래 자리일 것이다. 슬픔이 올라오면 그것을 억지로 누르려 하기보다, 그 슬픔이 어디로 향하는지 잠자코 지켜보는 일. 말이 나오지 않으면, 그 침묵을 어색함으로 메우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일. 어쩌면 나에게 절실한 것은, 조급하게 잘 견디려 애쓰는 방법이 아니라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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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말하는 ‘타고난 마음’이란, 무엇을 애써 만들어내기 이전의 상태, 이미 그렇게 반응하고 느끼고 있는 나의 본래 자리일 것이다. 슬픔이 올라오면 그것을 억지로 누르려 하기보다, 그 슬픔이 어디로 향하는지 잠자코 지켜보는 일. 

 

영화 속 오베라는 남자가 죽은 아내를 따라가려 했던 것도, 조급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위 『낭송 장자』의 가르침처럼 이웃과의 사소한 연결을 통해 현재와 관계를 넓혀간다. 오베는 죽음을 통찰한 게 아니라 그가 죽기로 다짐할 때마다 마을에서 그를 필요로 하는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자연스러운 관계로 이어졌다. 그는 더 이상 죽으려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삶을 붙잡으려 애쓰지도 않는다. 이때의 그는 죽음을 극복한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더 이상 문제로 삼지 않는 상태가 된다. 장자는 죽음을 이해하는 방향을 열어주었고, 오베는 그 이해가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더 오래 남은 것은 영화 속 허구적인 장면이었다.

그 장면은 함이 없이(無爲) ‘지금 여기’를 온전히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다. 대단한 결심이나 통찰을 요구하는 일도 아니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이미 내 앞에 와 있는 것들을 밀쳐내지 않는 것일 게다. 무덤 앞에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을 때, 그 침묵을 내 탓으로 돌리지 않는 일. 잡초를 뽑다 돌아오는 그 시간조차,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다.

 

변화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법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사이에 있겠다. 그러나 그 사이도 도(道)와 비슷할 뿐 아직 도는 아니어서 , 거기서도 세상의 번뇌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연의 도와 덕을 따라 자유롭게 노닌다면 그렇지 않게 된다. 명예도 없고 비난도 없이, 한번은 용이 되고 한번은 뱀이 되어, 시절 인연에 따라 변할 뿐, 한 가지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한 번은 오르고 한 번은 내려오며, 조화(和)를 도량으로 삼는다. 만물의 시원에서 자유롭게 노닐면서 만물을 만물로서 존재하게 하되 자신은 다른 사물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 세상의 번뇌가 있을 수 있겠느냐?(『낭송 장자』, 장자 지음, 이희경 풀어 읽음, 북드라망 p72)

그렇다면 길은 정해졌다. 세속적 욕망과 부귀의 생리를 통찰하여 거기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생명의 활력과 일상의 기쁨은 그것대로 충분히 누려야 한다. 한마디로 잘 살아야 한다. ‘별일 없이 잘 사는 것.’ 나아가 ‘명랑하게 천수를 누리며 사는 것.(『현자들의 죽음』 고미숙 지음, EBS BOOKS p75)

장자의 말처럼 생을 붙잡을 것도 아니고, 사를 밀어낼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사이를 흐르는 것이다. 붙잡지도 밀어내지도 않은 채, 그때그때의 변화에 마음을 두는 일이다. 고미숙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세속과 은둔 사이, 정치와 생명 사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머무는 태도”일 것이다.

나는 33년을 기자로 살아왔다.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신 전하는 역할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나를 드러내기 위한 일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기자’라는 이름에 기대어 나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점점 다른 사람에 의해 규정되는 내가 ‘진짜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왔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자리를 떠나 다른 길을 택하는 건 어딘가 외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나마 사회가 제도적으로 정해 놓은 정년퇴임을 앞둔 지금, 나는 한 가지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시절 인연에 따라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사이에서의 삶을 생각해본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별일 없이 잘 살기’에 동참하고 싶다. 무엇이 되려 애쓰기보다 주어진 삶의 활력과 일상의 기쁨을 충분히 누리는 태도. 그것이, 변화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 될 것이므로 결코 쉽지 않겠지만 ‘시작이 반’이란 말을 믿고 그 여정에 첫발을 내딛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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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별일 없이 잘 살기’에 동참하고 싶다. 무엇이 되려 애쓰기보다 주어진 삶의 활력과 일상의 기쁨을 충분히 누리는 태도. 그것이, 변화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 될 것이므로 결코 쉽지 않겠지만 ‘시작이 반’이란 말을 믿고 그 여정에 첫발을 내딛어 보려 한다.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1학기 동안 장자와 소크라테스를 통해 배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붙잡고 씨름하지 않는 태도였다. 명랑하게 별일 없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다 보면, 오베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어느 순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게 되는 ‘경지’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말이다. 아내와의 관계 또한 한 방향으로 고정시키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흘려보내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나는 무덤 앞에서 여전히 말을 못하지만, 이 침묵을 억지로 채우려 애쓰지는 않으려 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울음을 울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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