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별이 사라져버린다면
혹은 모두 죽어버린다면
나는 결국 텅 빈 하늘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그 완전한 어둠의 숭고함을 느끼게 되리라
물론, 그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Were all stars to disappear or die,
I should learn to look at an empty sky
And feel its total dark sublime,
Though this might take me a little time.
『Homage to Clio』 (1960)
미국 시인 W. H. Auden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The More Loving One)’에서 노래한 것처럼, 나의 무덤 앞 침묵 또한 쉽게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내의 주검 앞에서 질장구를 친 장자 역시 처음부터 초연했던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그는 슬픔을 겪은 뒤, 생과 사를 기가 모였다 흩어지는 변화의 흐름으로 이해하면서 죽음을 단절이 아닌 순환으로 받아들였다. 그랬더니 울음이 그치더라는 것이다.
내가 장자처럼 죽음을 ‘변화’로 이해하는 일은 이성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의식에 각인된 ‘이동’의 관념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딘가에 여전히 아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 그곳으로 언젠가 다시 닿을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기대. 그것을 버리는 건 마치 인연을 저버리는 것처럼 힘겨운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연 끊기가 고단했으면 누군가는 이를 악연이라고 했을까. 더군다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미뤄볼 때 나는 이 두 감각 사이에서 오랫동안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고 있을 게 뻔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시간이다.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 굳어버리지 않도록 흘려보내는 시간. 그 시간은 어쩌면, 무엇을 더 하려 애쓰기보다 이미 내 안에 올라와 있는 감정들—슬픔이나 그리움, 혹은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들—을 그대로 흘러가게 두는 일일 것 같다. 장자도 시간이 걸릴 거라고 위로를 해주고 있지 않는가.
어떤 일도 긴 시간을 들여야 이루어집니다. 한번 잘못되면 고칠 수 없으니 조급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이 되어 가게 두면서 마음을 놀게 하세요. 피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타고난 마음’을 기르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리저리 너무 많이 따지지 마십시오.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것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낭송 장자』, 장자 지음, 이희경 풀어 읽음, 북드라망, p.55)
장자가 말하는 ‘타고난 마음’이란, 무엇을 애써 만들어내기 이전의 상태, 이미 그렇게 반응하고 느끼고 있는 나의 본래 자리일 것이다. 슬픔이 올라오면 그것을 억지로 누르려 하기보다, 그 슬픔이 어디로 향하는지 잠자코 지켜보는 일. 말이 나오지 않으면, 그 침묵을 어색함으로 메우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일. 어쩌면 나에게 절실한 것은, 조급하게 잘 견디려 애쓰는 방법이 아니라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