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하고 있는가? 매일 드라마 보는 시간은 필사와 책 읽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밥을 먹는 것처럼 매일 읽고 쓴다. 필사를 하다 세탁기 알람 소리에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다시 쓴다. 때로는 세탁기 알람이 방해가 아닌 반가움으로 다가온다. 허벅지가 뻐근하고 팔이 저릴 때, 세탁기 알람 소리는 친구의 전화만큼 반갑다. 의자에서 일어서는 게 이렇게 즐거움이 된다. 난 의자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에도 감사함을 느낀다. 터치만 하면 볼 수 있는 드라마 시청 후에 이상하리만치 현실에 불평을 쏟아내는 나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쉽지는 않지만 필사를 꾸준히 하다 보면 시간이 누적되어 어느 순간 그 어렵던 한자를 내 손이 먼저 쓸 때가 있다, 한 줄 외우기도 힘든 내가 한 괘를 완성할 때 마다 골프 코스를 프로와 치다가 70타로 마무리한 기쁨이 있다. 난 아침마다 이글과 버디 때론 알바트로스를 오가며 필사를 한다. 물론 보기와 더블보기, 벙커는 수없이 존재한다. 나는 작년에 32괘를 외워서 시험을 봤다. 드라마와 바꾼 생활 변화의 결과이다.
변화의 시작은 드라마를 끄고 책상에 앉는 작은 멈춤에 있었다.‘초구, 공용황우지혁(鞏用黃牛之革)’. 황소의 가죽으로 굳게 묶는다. 의욕만 앞서 설익은 변화를 시도하지 말고, 아직은 내면의 힘을 기르며 스스로 단단히 규율을 지켜나가야 한다.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 혁명의 첫 시작은 책상에 앉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필사를 하는 것이다. 필사는 바른 자세로 하루를 시작하게 한다. 으뜸되고, 형통하고, 이롭고, 올곧게 가기 위한 첫 시작이다. 아직도 허세스런 특징은 버리지 못했다. 친구들과 약속 시간에 먼저 도착해 카페에서 냅킨에 괘를 쓴다. 친구들이 놀라며 볼 수 있게 옆에 놓아둔다. 에르메스 백을 산 친구가 테이블에 가방을 살며시 올려놓듯 나는 주역의 괘를 쓴 냅킨을 올려둔다. 올해는 이 허세도 그만할 예정이다. 32괘를 외워서 쓸 수 있으니 그런 장난은 이제 안 해도 된다. 친구들을 위해 얇은 니체 필사책을 선물로 올려놓을 예정이다.
필사로 인해 달라진 나를 보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떠오르면 펜을 잡고 주역의 괘를 외워서 쓴다. 외운 괘가 생각이 안 날까 살짝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암기한 단어들을 정성스레 쓴다. 기억나지 않는 한자를 되뇌이며 쓰다보면 내가 언제 미워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잊게 된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누군가를 미워할 시간이 없다. 한 주에 한 괘를 완성해 나가다 보면 필요 이상의 불필요한 행동을 안 하게 된다. 아버지는 내가 자주 오길 바라신다. 매일 간병인이 오고, 세끼를 어머니가 매일 따뜻하게 밥을 지어드린다. 그럼에도 요구하는게 많으시다. 예전 같으면 뒷골을 부여잡으며 아버지의 마음에 맞춰드렸었다. 주5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젠 내가 가능한 시간을 알려드리고 솔직하게 나를 드러낸다. 방문 가능한 날을 알려드린다. 원형리정에 입각한 거절은 신기하게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불평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드린다. 아버지도 매일 필사 숙제가 있으니 그 안에서 성장하시길 바란다. 나만 성장하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다. 한 주에 한 괘, 두 주에 두 괘, 점차 늘어나 8주가 되면 여덟 개의 괘를 외워서 쓰게 된다. 일상의 자잘한 고민들과 비효율적인 생각들은 내 곁에서 멀어진다. 나에게 필사와 암기는 참 좋은 보호막이다. 올해 64괘를 외워야 하니 매일 일정 시간은 주역과 함께해야 한다. 나의 보호막이 더 두터워질 듯하다.
그럼 나의 변화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완전한 변모를 이루는‘구오, 대인호변, 미점유부(九五, 大人虎變, 未占有孚) 대인이 호랑이 가죽 무늬처럼 변함이니, 점을 치지 않더라도 믿음이 있다.’너무 멋진 구절이다. 겉치레만 바꾸는 것이 아닌 내면의 덕이 극에 달해 그 덕이 겉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며 세상을 새롭게 하는 기상이 뚜렷한 호랑이가 떠오른다. 나도 남의 눈치를 보고 나를 죽이며 주변의 시선에 맞추는 행동대신 내 시간을 내가 결정하고,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는 빛바랜 털을 갈아치우고 싶다. 언젠가 내가 선명하게 드러나 고유한 무늬가 내 몸에 새겨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