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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얼음 추가? 농담 추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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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8-03 09:34 조회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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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추가? 농담 추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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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 현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죽음에 대한 무지

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부둥켜안고 펑펑 울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본 드라마,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시신 위에 엎드려서 엉엉 울었으니까. 나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2023년 7월 29일(음력), 출근길 새벽에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원래 전화를 잘 못 받는 편인데 이 전화는 또 재깍 받았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하지만 바로 목포로 내려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때 내가 하던 알바는 택배하차였고, 추석시즌이라 물량이 많았다. 한 명이라도 빠지면 같이 일하는 사람이 힘들 것이다. 그래서 정신없이 몸을 쓰고, 일 끝나고 목포로 내려가는 기차에 탔다. 그리고 회사에 전화했다. 며칠 못 나간다고.

목포에 도착 후 장례식장으로 갔다. 하지만 엄마를 볼 수 없었다. 염을 하는 동안에는 못 만난다고 했다. 다음 날 볼 수 있었다. 그 때 많이 울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례지도사님이 염을 끝내고 메이크업을 해주셨는데 엄마의 평소 화장법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죽음은 내 상상과 달랐다. 죽음을 대하는 내 태도도, 돌아가신 엄마도.

3일장을 마친 뒤 엄마의 물건을 정리했다. 옷, 화장품…들을 정리하던 중 서류더미가 나왔다. 장기요양보험혜택을 받고 있었던 엄마에게 온 주간보호기록지였다. 매달 재가복지센터에서 보내주는 문서다. 거기에는 엄마가 몇 월 며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요양보호사에게 돌봄을 받았는지 나와 있다. 그 시간은 대부분 정서지원, 이동지원, 개인활동지원, 청소지원, 식사지원 들이었다. 그리고 주욱 내려가면 밑에 특이사항란이 있다. 거기는 요양보호사가 직접 서술하는 공간이다. 요양보호사는 이렇게 썼다. ‘어르신께서 많이 외로워하셔서 함께 손뼉치기 놀이(쎄쎄쎄)를 했습니다. 어르신께서 우울해하셔서 함께 트로트를 불렀습니다.’ 당신의 외로움을 외면해서, 미안해서 많이 울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목포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며칠 뒤 작은엄마께 연락이 왔다. 내가 신경 쓰이셨는지 반찬을 보내주겠다며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셨다. 평소 엄마가 보내준다고 했을 땐, 알아서한다며 거절했지만, 차마 작은엄마에게는 거절할 수 없어서 주소를 알려드렸다. 며칠 뒤 반찬이 왔다. 맛있게 먹었다. 잘 먹었다고 카톡했다. 작은엄마께서 아주 기뻐하셨다. 하지만 나는 울었다. 누가 준다는 반찬을 받아서 맛있게 먹고, 고맙다는 말만 해도, 사람을 이렇게 기쁘게 만들 수 있는데, 엄마한테 그것조차도 못 해줬구나, 라는 생각에 많이 미안했다.

이렇게 미안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더 잘 해야 할 것이다. 나중에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특히 아버지와 새어머니께. 하지만 나는 그 분들께도 무심하다. 미안하다면서 미안해 할 일을 한다. 앞과 뒤가 다르다. 이것을 보고 무지라 한다. 나에게 엄마의 죽음은 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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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면서 미안해 할 일을 한다. 앞과 뒤가 다르다. 이것을 보고 무지라 한다.

 

쓸모를 따지는 마음

무지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명이다. 어둠이다. 여기 빛을 비춰보자. 그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자. 나는 엄마에게 미안할 짓을 했다. 계속 거절하고 차갑게 굴었다. 이러면 보통 사람은 나에게 질려 연락하지 않고 관계를 끊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계속 전화했다. 넘어져서 고관절 수술을 받기 전까지. 단순히 엄마니까 모정으로 자식에게 관대했던 거라고 생각해야하나? 아니다. 엄마는 나에게 바라는 모습이 있었다.

엄마는 계속 제안했다. ‘승현아, 서울에서 철학공부 언제까지 할 거니? 그만하고 내려 오니라, 목포 오면 엄마가 철학관 차려줄게’, ‘승현아, 엄마 친구가 그러는데 ‘내가 네 아들이면 내 딸 시집보내겠다(나는 이 분을 본 적이 없다. 그냥 엄마만 보고 이 얘기를 하신거다).’ 이러더라, 근데 못 받았다. 너가 직장이 없어서. 승현아 평생직장을 구해야 돼.’, ‘승현아, 너 광주 숙모 알지? 숙모 아는 사람이 강원도에 있는데 너가 원하면 일자리 소개시켜줄 수 있다더라, 한 번 가볼래?’, ‘승현아, 황창연 신부님께 가봐라, 거기가면 너 같은 애들 많다더라. 가면 영어도 배울 수 있다드라, 엄마가 알아봤는데 지금 자리 났단다.’(황창연 신부님은 강원도 평창에서 성필립보 생태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운영하신다.)

엄마의 제안에 대한 나의 답은 전부 no! 였다. ‘아니요, 내비둬요, 에, 에, 에, 알아서 할게요. 끊어요.’ 반찬을 보내준다는 작은 선물도 거절했다. 왜냐하면 엄마에게 하나라도 허용하면, 그게 사소한 반찬이더라도, 댐에 구멍 뚫린 듯이 휩쓸려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목포로 내려가든, 엄마가 원하는 직장인의 삶을 살든. 그게 뭐가 문제냐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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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엄마가 나에게 바라는 두 가지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목포로 내려갈 순 없었다. 목포엔 친구가 없었다. 다시 고립되고, 외로워지는 길이었다. 혹시나 길가다 학교동기라도 만난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뻘쭘하고 어색하고 못 본척하고 피하고. 하지만 서울은 달랐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감이당에서 같이 공부했었던 친구들과(그나마 편안한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직장인의 삶은? 그것 또한 불가했다. 이미 강학원에서 ‘공부하는 백수’ 세례를 받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규직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엄마의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내게는 그저 잔소리, 쓸모없는 말로 들렸다. 그 때, 나에게 쓸모는 목포 바깥에, 정규직 바깥에 있었다. 그렇게 쓸모를 따지느라, 엄마에게 그토록 냉정했다. 쓸모만 따지면 사람이 차가워진다. 관계를 파탄내는 이 태도를 장자는 땅으로 비유한다.

 

─ 다음 글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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