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말이 쓸모없다는 혜시의 말에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 쓸모있는 땅만 남긴답시고 발밑 땅을 제외한 모든 땅을 깎아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그럼에도 쓸모없는 땅이 쓸모없는 거냐고. 쓸모없는 것을 알아야 쓸모있는 것을 안다고.
나는 목포에서의 삶을 쓸모없다고 여겼다. 그냥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라고 여겼다. 외롭고 고립됐었다. 하지만 그 덕에 공부를 하러 올 수 있었다. 덕분에 아주 미약하지만 친구들과 글을 읽고 쓰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규직은? 정규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직장생활. 그 갑갑한 걸 어떻게 해? 어차피 취업도 안 될 거야! 하지만 정규직들이 사회를 굴린 덕분에, 공동체에 접속한 정규직들이 많은 선물을 해준 덕분에, 공동체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사람은 도움을 받았으면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런데 무작정 싫다고 떼만 썼으니, 참… 어리석다. 자신에게 좋은 것, 이로운 것, 쓸모있는 것만 하고 다른 건 배척하는 이런 상태를 네 글자로 표현하면, ‘낭떠러지’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발만 디뎌서 되는 게 아니다. 비어 있는 곳, 다시 말해 쓸모없는 곳이 있어야 발을 디딜 수 있다. 발 딛는 부분만 남겨두고 다 없애 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게 바로 낭떠러지다! 현대인들이 꼭 이렇게 살고 있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빈 터를 용납하지 않는다. 도로도 그렇고 집 안도 그렇다. 채우고 또 채우고… 그러면서 말한다. 숨이 막힌다고, 죽을 것 같다고. 출구는 간단하다. ‘사이 공간’을 확보하면 된다. 숨 쉴 수 있는 공간,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 외부와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간, 그런데 왜 안 될까? 비움과 채움을 완전히 이원화한 탓이다.(『현자들의 죽음』, 고미숙 지음, EBSBOOKS, 86~87쪽)
장자의 빈 땅 이야기를 읽었을 때 단순히 쓸모있는 것만 따지다 이동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린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그림으로 상상해보면 정말 낭떠러지다. 낭떠러지에서는 누구나 자기생존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오로지 버티기만 할 것이다. 타인에게 관심 가질 여유는 없다.
이 낭떠러지를 벗어나지 못 하는 이유는 쓸모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 사이에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는 그 사이공간이 없다. 넘을 수 없는 벽만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둘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바로 숨 쉬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나만의 사적인 공간과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말하는 걸까?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는 외부와 자유롭게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시·공간이다. 공부공동체든, 직장이든, 가정이든 이렇게 자유로이 소통할 수 있으면 그곳이 바로 사이공간이다. 하지만 현대인들 대부분 이 공간을 만들지 못 한다. 비우는 것과 채우는 것이 나눠졌기 때문이다.
비우고 채우는 건 간단히 생각해보면 하나다. 매일 먹는 밥그릇만 봐도 안다. 밥그릇을 비워야 다음 끼니에 채울 수 있다. 또 채워서 먹어야 다음 끼니에 쓸 수 있다. 또 뭔가를 배우려면? 기존의 지식, 태도를 비워야 배울 수 있다. 머리로는 대충 알겠다. 그런데 정말 일상에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비우고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쉽지 않다. 왠지 그런 사람은 줏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자기 가치관에 맞는 것만 고르면, 즉 쓸모없는 건 거절하고 쓸모있는 것만 받아들이면 낭떠러지에 서게 된다. 이 강력한 이분법을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까?
자아에 대한 집착을 비운다. 카렌 암스트롱의 표현을 빌리면 ‘자아를 굶기는’것. 우리는 대부분 생을 자아를 살찌우는 데 바친다. 자아가 비대해지면 이분법이 견고해진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 나의 것과 남의 것 등. 거기가 바로 번뇌의 원천이다.(위의 책, 93~94쪽)
공부하러 와서 자아를 굶기기는커녕, 공부하는 백수라는 새로 배운 자아를 살찌우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평소에 교회를 너무 사랑해서 길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분들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내가 엄마한테 하고 있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자아는 어떻게 굶길 수 있을까? 다른 이들이 하는 모든 말에 ‘예, 예, 예 맞습니다’ 하고 동의하면 자아가 사라질까? 그러면 정말 줏대 없는 인간이 된다. 아니면 절에서 스님들이 하는 것처럼 오계를 따라야 할까? 거짓말 금지, 육식 금지, 과식 금지… 이런 금지들을 계행으로 지키면 자아를 굶길 수 있을까? 그러려면 스님이 돼야 된다.
자아는 자신이라고 믿고 강력하게 지키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견해다. 그것이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을 만든다. 내가 옳다는 생각은 쓸모없어 보이는 다른 이의 생각을 못 듣게 만든다. 엄마의 말을 모두 무시했던 것처럼. 이럴 때 자아를 굶기려면? 엄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봐야한다. 그 마음을 이해하려고 할 때, 내 생각에서 벗어나서 뇌에 다른 길을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