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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덕분에](글창고 순환업로드)1. 지동설 – 우주는 저절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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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9-06 09:14 조회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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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동설 – 우주는 저절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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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영(글공방 나루)

근대 과학의 출발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지동설’이다. 그전까지 우주에서 움직이는 건 우리 지구가 아니라 저 하늘의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었다. 이런 천동설은 어찌 보면 아주,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라. 나는 가만히 있고 해와 구름, 달과 별이 운동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감각은 움직이고 있는 건 분명 하늘임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이것이 전도된 생각이었음을.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각 너머 우주의 모습을 알려준 인물은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다. 물론 그에 앞서 지구의 움직임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는 것, 즉 태양중심설이다. 이에 비해 갈릴레오의 우주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는 저 하늘의 존재들처럼 지구 또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갈릴레오가 하지 않았지만 했다고 전해지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은 그의 우주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늘이 움직이듯, 지구도 움직인다. 고로 모든 것은 움직인다.

 

# 아리스토텔레스, 운동은 방황일 뿐.

갈릴레오 당시의 가톨릭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자연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에 던진 질문은 간명했다. ‘왜 사물들은 변화하고 움직일까?’ 자연의 변화와 운동이 그의 탐구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겉보기와는 다른 의미가 담겨있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어째서 사물들이 움직이는 이유가 궁금할까. 왜 그것이 유독 눈에 띄게 될까. 그건 사물들의 움직임이 이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랬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사물들의 변화와 운동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요컨대, 그건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이었다. 그에게 자연의 자연스러운 모습, 그것은 정지 상태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은 어떤 면에서 지극히 자연스럽다. 자신의 방을 둘러보라. 대부분의 것들이 정지해 있다. 그 속에서 무언가 움직인다면?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사물들은 그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우리의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감각 경험에 기대어 있다.

물론 우리의 감각에도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바로 하늘의 사물들. 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계를 둘로 나눈다. 계속해서 운동하는 하늘이라는 세계와 정지 상태가 기본값인 지상이라는 세계. 그는 이 둘의 차이를 사물들의 본성에서 찾았다. 우선 하늘의 존재들은 ‘에테르’라고 하는 순수하고 깨끗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들은 불변의 영원한 존재로서 완전한 운동인 원운동을 하고 있다.

반면 지상의 존재들은 4가지 요소들이 모여 이루어진다. 먼저 4가지 본성이 있는데, 따뜻함과 차가움, 건조함과 습함이다. 다음으로 이 본성들이 헤쳐 모여 4가지 요소가 생긴다. 물, 불, 흙, 공기다. 지상의 사물들은 이 네 요소가 서로 다른 비율로 섞여서 만들어진 혼합물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물들이 운동하는 이유가 있다.

4요소인 물, 불, 흙, 공기는 그 본성에 따라 각자만의 자리를 가진다. 가장 무거운 흙은 맨 아래 자리인 땅에 있으려 하고, 물은 그 위에, 다시 공기는 물 위에, 그리고 가장 가벼운 불은 맨 위에 있으려 한다. 그런데 지상의 존재들은 이 요소들이 지저분하게 섞여 있다. 물론 사물마다 각각이 가진 요소들의 비율은 다르다. 이를테면 어떤 것은 불의 요소가, 어떤 것은 공기의 요소가 주된 본성을 이룬다. 그리고 이런 주된 요소가 사물들이 머무르는 자리를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사물들이 자신의 고유한 자리에서 벗어나게 되면 운동이 시작된다. 자신의 본성에 적합한 자리를 찾아가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금 자신의 자리를 찾으면? 운동은 끝난다. 위로 던진 공이 아래로 다시 떨어지는 이유, 끓는 물의 수증기가 위로 올라가는 이유, 그것은 사물들이 자신의 영역으로 되돌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은 사물들이 자기 자리에 있지 못한 것으로 인해 발생한다. 요컨대, 운동이란 무질서나 균형파괴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자연은 이 무질서를 회복해서 ‘코스모스(질서)’를 이루려 한다. 과학사가 코이레의 말대로, “모두가 ‘질서 잡혀’ 있다면, 모든 사물은 자신만의 자연스러운 장소에서 휴식하고, 거기에 머물며, 거기를 떠나지 않”는다. 사물들은 자신들의 본성에 맞는 장소를 찾아 그곳에 휴식하고자 ‘운동’하는 것이며, 질서로의 회귀가 운동이다. 하여 운동은 비정상적인,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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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은 사물들이 자기 자리에 있지 못한 것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런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관으로도 이어진다. 우리가 삶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게 되는 건 제자리를 찾지 못해서다. 요컨대, 그것은 정처없이 헤매는 방황일 뿐이다. 삶의 목표는 자신의 자리는 찾는 것, 그럼으로써 운동을 끝내는 데 있다. 혼란스러운 방황 끝에 찾아오는 휴식. 이 세계에서 운동과 변화는 자신에게 적합한 자리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과정일 뿐이다. 하여 과정이 아무리 즐겁고 만족스러워도, 도착이라는 결론이 없으면 그건 쓸데없는 일이 된다. 부차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서 운동과 변화. 자연은, 지상의 존재인 인간은 오직 정착하기 위해 운동할 뿐이다.

 

# 갈릴레오, 운동은 존재의 본성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지된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 지상의 존재들이 하늘보다 못할 이유는 없다. 하늘이 끊임없이 운동하듯, 지상도 그렇게 운동한다. 정지한 듯 보이는 사물들은 실상 우리 감각의 한계로 인해 생긴 착각이다. 우주의 실상, 자연의 실상은 움직임이다. 그러니 이 우주가, 천지만물이 움직이는 데는 다른 이유가 필요 없다.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 그 자체가 모든 존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주는 저절로 움직인다!

우리는 갈릴레오의 우주관에 친숙하다. 더욱이 동양 사유적 기반 위에서 자라온 우리에게 끝없이 변하는 자연이란 익숙한 이미지다. 현대 과학은 갈릴레오의 이런 세계관을 더욱 확장해, 이 우주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구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태양도 움직이고, 태양계 자체도 우주를 돌고 있다. 심지어 이 시공간 자체도 팽창하고 움직인다. 이 우주 어디에도, 그 무엇도 정지해 있는 건 없다. 요컨대, 천동도 아니고, 지동도 아니고, 우주가 동(動)하고 있다.

하지만! 갈릴레오의 이런 세계관이 일상으로 들어오면? 실제 사람들과 관계 맺는 현장에 들어오면? 어찌된 일인지 이런 세계관은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우주의 본성이 운동과 변화라는 건 딱 과학 이론을 접할 때만 통하는 얘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세상은 변하는 거라고, 사람은 바뀌는 거라고,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고 얘기하지만, 막상 그런 변화와 운동 앞에서 우리는 실망하며 인상을 찌푸린다.

우리 일상에서 작동하는 세계관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가깝다. 우리는 언제든 운동과 변화가 끝나길 바란다. 지금은 이렇게 돌아다니지만 언젠간 완전히 정착할 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 오늘의 운동과 변화를 견딘다. 운동은 끝날 것이라고. 아니, 끝나야만 할 것이라고. 하지만 갈릴레오 이후, 과학은 우리에게 온 우주는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건 운동과 변화뿐이라고 말이다. 이런 우주에서 운동을 끝내고 정착한다는 게 뭘까. 그건 원리상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 망상이지 않을까.

사실 그 누구보다 우리 자신은 잘 알고 있다. 목표를 향해 열정을 불태우며 있는 힘껏 달려가지만, 정작 그곳에 이르렀을 때 찾아오는 묘한 허망함을. 여기가 아닌가 싶어 다른 곳에 가보아도 ‘역시나’라는 후회가 밀려옴을. 하여 그동안 거쳐 왔던 모든 나의 길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그 낭패감을. 그리고 결국 남는 것은 망가진 몸과 세상에 대한 냉소, 그리고 자신에 대한 무력감일 뿐임을.

이런 좌절은 이 우주에 도착지가 없다는 데서 생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온전히 정착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있을 거라는, 우리의 전도된 생각이 삶을 결핍으로 만들고 있다. 갈릴레오 이후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도착에 대한 욕망. 갈릴레오의 우주로 깊이 들어가 이 욕망의 방향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운동하느냐 정지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운동 하느냐가 될 것이다.

운동과 변화는 그 자체로 존재이고, 삶이다. 모든 도착지는 잠시 머무는 베이스캠프에 지나지 않는다. 새롭게 길을 내기 위한 베이스캠프. 다음의 길 위에서 다시금 마련되어야 하는 베이스캠프. 자연은 우리를 도착지로 안내하지 않는다. 도리어 삶을 끊임없이 도착지로부터 미끄러지게 하는 것. 그것이 우주의 본성이다. 하여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하는 건 움직이는 우주 위에서 유영하는 즐거움이 아닐까. 니체가 말했듯, 미끄러운 얼음은 춤을 잘 추는 사람에게는 천국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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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운동하느냐 정지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운동 하느냐가 될 것이다.

 

# 왜 정지해있는 거지?

그럼에도 이쯤 오면 궁금해질 거다. 분명 내 앞에 책상은, 컴퓨터는 멈춰있는데……이 정지 상태는 뭐지? 이런 감각마저 다 가짜란 말인가? 그렇다면 대체 뭘 보고, 뭘 믿고 살아야 하는 거지?

맞는 말이다. 우리 주위에는 분명 정지해 있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가짜도, 환상도 아니다. 갈릴레오도 이를 알았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 우주, 이 우주에서 정지한 것으로 느껴지는 사물들. 하여 갈릴레오에게 놀랍게 다가온 현상은 사물들이 정지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해서 그는 묻는다. 왜 어떤 사물들은 정지한 것으로 보이는 걸까?

갈릴레오는 이 질문과 함께 자신의 사유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 나오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이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이는 지동설이 어째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어려운 문제였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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