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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4-12-16 14:02 조회311회 댓글22건본문
연기론 아이피 220.74.41.145 작성일 24-12-15 00:35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인도에서 불교는 이단이고 '우파니샤드' 와 '바가바드기타' 는 힌두교의 오래된 경전이고 힌두교는 대표적인 실체론이고 부처가 이야기한 불교의 핵심은 강력한 비실체론인 '연기론' 인데 불교와 힌두교를 같이 공부할수 있다는 게 조금 이해가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 불교에서도 이야기되어지는 '윤회' 는 브라만교와 브라만교의 후신인 힌두교가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불교는 힌두교처럼 거창한 우주론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연기론' 처럼 비실체론이고 모든것을 인간의 틀내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는 내용이고 이 둘(불교와 힌두교) 은 공통된 것보다는 오히려 대립되는 내용이 많아서 불교와 힌두교를 같이 공부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감이당 댓글의 댓글아이피 122.153.101.249 작성일 24-12-15 12:06
안녕하세요?
먼저 이 코너는 내년 프로그램 “미리보기”이고,
본격적인 프로그램 소개는 향후 다시 올라올 예정이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불교와 힌두교는 대립되는 내용이 많아서 같이 공부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시군요.
그런데, 불교의 고유한 가치는 힌두교와 비슷한 점, 차이점을 비교할 때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라고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도 말했습니다.
위에 예로 들어주신 김영진 선생님의 글 또한 비교연구를 통한 결과일테구요. 그런 의미에서 비단 힌두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종교사상에 대한 비교연구도 필요할 것입니다.
아마도 ‘불교를 실체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의 말씀은 불교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주신 듯 합니다.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라는 붓다의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목성 프로그램 <불교와 글쓰기>에 대한 관심 감사드립니다.
연기론 아이피 220.74.41.145 작성일 24-12-15 01:13
불교가 인도에서 이단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까닭은 강력하게 ‘비실체론’ 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비실체론’ 앞에서 인도종교나 인도철학이 숭배한 숱한 개념들은 산산이 조각난다. 불교의 ‘비실체론’ 을 대표한 교리는 역시 ‘연기론’ 이다. 연기는 한자로는 ‘인연생기’ 의 줄임말이다. 보통 인은 직접 원인으로, 연은 간접원인으로 푼다. 원인이라는 말대신 조건이라고 해도 좋다. 연기라는 말은 원인이나 조건을 통해서 사물이나 사건이 발생하고 변화하고 소멸한다는 의미다. ‘나한테 내가 없다.’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고, 의존해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이 단순한 선언은 거대한 작용을 했다. 새로운 윤리를 초래했고, 새로운 세계관을 수립했다......(중간 생략).......인도철학 전통에서는 숱한 신이 등장한다. ‘베다’나 ‘우파니샤드’는 위대한 신을 찬양하는 시로 가득하다. 하지만 불교는 신도 인간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한다. 그도 연기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신도 무아다. 결코 그를 고정된 실체로 볼 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연기론은 어떤 한 지점에서 세계가 출현했다거나 고귀한 한 분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고를 거부한다. 창조자가 손에 든 진흙은 창조 이전의 무엇이리라. 불교는 지고지순한 그 한 점을 지워버린다. 그래서 무신론이라는 불경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다. { 공이란 무엇인가 / 지은이 김영진 / 그린비 20쪽~21쪽에서 인용함 }
제 주장의 근거가 되는 위의 글을 인용합니다. 글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연기론 아이피 220.74.41.145 작성일 24-12-15 16:18
'대승불교'로 불교를 혁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용수(나가르주나)' 는 붓다가 자신에게 '연기법' 을 선물했다고 말합니다. '연기론' 은 앞으로 우리가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리고 사상적으로 '유물론' 을 갱신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힌두교가 인도에서 불교를 제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윤회 사상' 이라고 했을 때, 힌두교의 '윤회'와는 다른 불교의 '윤회'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힌두교의 '윤회 사상' 은 중생의 평등을 강조한 불교와는 다르게 '카스트 제도' 를 유지하기 위한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힌두교와는 다르게 '우주론' 이 없습니다. 그리고 힌두교와는 다르게 어떤 실체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제 오해인지도 모르겠지만 과학과 영성을 강조하는 '감이당'이 행여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실체론' 으로 가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제 기우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불교' 에서는 이런 말도 합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 라는 붓다의 말씀과도 통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못 알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실체론의 정점' 으로 의심되는 힌두교의 내용이 담겨져 있는 아래와 같은 글을 인용하면서 제 긴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육체가 아니라, 육체에 내재해 있는 아트만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태어나고 죽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불변의 존재다. 아트만은 세계의 근원이자, 영원불변의 참된 실재인 브라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브라만과 아트만의 관계는 알 듯 모를 듯 하지만, 비유적으로 생각해보면 무슨 뜻인지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세종대왕이 지었다는 <월인천강지곡>이라는 찬가의 제목은 하늘에 떠있는 달은 하나지만, 1000개의 강에 달이 비쳐져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1000개의 강의 모습은 각기 다르지만, 여기에 비쳐진 달이 모두 같은 달이듯, 브라만은 하나이지만, 수많은 개별적 사물에도 존재한다.
문성훈 교수의 철학에세이,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 / 문성훈 지음 / 이소노미아 65쪽~66쪽에서 인용함
연기론 아이피 220.74.41.145 작성일 24-12-15 23:35
제가 '감이당' 에 대하여 질문하는 내용의 본질은 세계의 모든 종교사상에 대한 비교연구를 부정하는것이 아니라, 분명히 불교와 힌두교의 내용을 같이 공부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감이당' 이 불교와 힌두교에 대한 공부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무엇이고 감이당이 추구하는 원칙과 방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위의 답변을 볼 때 분명히 불교가 '실체론' 이 아니라는 부분에 대하여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명확하게 실체론인 '힌두교' 에 대하여 분명하게 부정하는 태도와 관점이 필요한 것이지, 굳이 불교와 함께 공부 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을 품게 됩니다. 혹시 제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부처가 말한 '연기론' 을 통하여 최근 사상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신유물론' 에 대하여 보완을 하거나 혹은 '유물론' 에 대한 갱신, 나아가서는 '마르크스주의' 에 대한 갱신 등, 종교적 구원이 아닌 철학적 사유의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철학자 '니체' 가 불교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수동적 니힐리즘' 혹은 '염세적인 니힐리즘' 에서 벗어나서 좀 더 '능동적인 니힐리즘' 으로 갈 수 있는 방향은 없는 것일까요? 불교가 '고통' 으로부터 시작하였고 결국 궁극적인 종착점은 '종교적 구원' 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니체가 '유럽의 불교' 로 혹은 '유럽의 붓다' 로 불교를 이야기하며 불교를 변화시키려한 사상가였다면, 자신에게 부처가 연기법을 선물했다며 '대승불교' 를 통하여 불교를 혁신하려고 한 용수의 '공사상' 또한 니체의 철학과 닿아있다고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물론 지금까지의 내용은 모두 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며, 실례가 됐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글이 길어지게 되어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연기론 아이피 220.74.41.145 작성일 24-12-16 12:54
이런 '연기적 사유' 와 누구보다 근접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사람이 '마르크스' 라고 한다면 많은 이가 뜻밖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때 그는 '헤겔' 이나 '포이어바흐' 처럼 인간에겐 고유한 본성이 있는데, 자본주의에 이르러 그것을 상실한 '소외' 상태에 빠졌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로부터 벗어나 역사적 조건에 따라 모든 것의 본성이 달라진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역사적 조건' 이란 말을 '연기적 조건' 이라고 바꾸어 쓰는 것만으로 마르크스의 이런 발상은 '연기적 사유' 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사고방식을 그는 '역사유물론' 이라고 명명하는데, 이때 '유물론' 은 물질의 실재성을 강조하는 통상의 '유물론' 과 다르다. 이런 발상법을 요약하기 위해 그는 바로 흑인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속에서만 노예가 된다." (<임금노동과 자본>, 범우사, 2008)
흑인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동물적 본성 같은 게 아니라, 총 든 백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특정한 관계, 그런 특정한 조건이다. 그 조건이나 관계가 달라지면, 흑인은 얼마든지 자유인이 될 수 있다. 덧붙이면 마르크스는 같은 글에서 흑인만이 아니라 방적기 같은 기계나 사물도 불변의 본성은 없으며, 특정한 관계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착취하는 관계에서 '역사적 조건' 을 바꿈으로써 다른 세상, 다른 인간이 출현할 것이라는 신념은 이런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 불교를 철학하다 / 이진경 지음 / 한겨레출판(주) 26쪽~27쪽에서 인용함.
많은 분들이 불교와 유물론 그리고 '마르크스' 와의 연관성에 대해서 물음을 가지실 것 같아서 긴글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위에 인용하여 봅니다. 이점 많은 이해 있으시길 바랍니다. 고정된 '실체론' 에 빠져 있는 힌두교와 다른 '비실체론' 인 불교의 역동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래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는 부처의 말씀, '선불교' 에서 말하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그리고 '연기론' 이 오히려 우리가 연관성이 없다고 느껴지는 유물론이나, 마르크스의 사상에 있다는 점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매번 마지막 글이라고 생각하면서 글을 올리는데, 그럴 때마다 추가되는 내용이 생각이 나서 이를 어기게 됩니다. 불편하신 분들이 있다면 사과드리고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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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
새해를 맞이하여 현실의 무상을 정시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과 오로지 현실 그속에서 돌파해나가는 길을 가려고 한 '고따마 붓다'의 생애를 생각해본다. 그러한 붓다의 생애와 가르침을 잘 표현한 아래와 같은 책의 구절을 인용하여 본다.
이러한 부처의 생애와 가르침은 부처의 '연기론'과 통해 있으며 나아가서는 마르크스, 니체, 들뢰즈, 스피노자의 사상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 '비실체론자들'이다.
{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정시(正視)하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무상을 정시하는 것이 깨달음(붓다)의 순간의 의미다. ‘죽는다’라는 무상의 현실 이외에 현실이 없다고 한다면 이미 외부로 나갈 탈출구는 없다. 따라서 현실 그 속에서 돌파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고따마 붓다의 생애가 아니었을까? 최종적으로 사람은 홀로 죽음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현실 이외에 영원히 구원받게 될 저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다면 솔직히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 ‘저 세상’이란 절망 아닐까? 불사(不死)의 ‘저 세상’이라고 해도 그것이 무엇인가의 형태로 ‘존재하는’ 한에서는 그 존재를 무상화하는, 냉혹한 무상의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을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다. 사후는, 지금 이렇게 해서 살아가는 세계를 단순히 반전시킨,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세계’인가?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허무’인가? 그 누구도 사후 세계에 가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가본 것처럼 자기 식대로 그것을 표현했다. }
[ 무상의 철학/ 타니 타다시 저자(글) / 권서용 번역 / 산지니에서 인용함. ]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
결국 신체와 정신의 관계에서 이 둘(신체와 정신)을 분리된 관계로 바라보느냐? 즉 마음이 우위에 서서 신체를 바라보거나 정신을 신체(물질)로 환원해서 바라보느냐가 아니다. 그렇게 바라보게 되면 신체를 역량의 문제로 사유하는게 불가능해진다. 아래 댓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신체의 역량을 중심에 두고 사유하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고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마음을 두고 평온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 '스피노자'식으로 이야기하면 '변용능력'이 낮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그런 분들의 마음과 삶도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른 방식과 차원의 문제해결이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사유를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낳기를 원하는 위험한 '실험가'의 사유를 우리가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험가들'은 많지 않고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도덕의 비난에 직면해 있다. 물론 그 길은 험하고 긴 투쟁의 길이다. 믿음도 어렵지만 사유는 그보다 백배, 천배 어렵고 위험하다. 결국, 신체와 정신의 운동은 동일한 운동이며 그것은 역량의 문제로 수렴되고, 사유하는 문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철학적으로 사유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의 글은 계속 보아도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글이다. 죄송하지만 아래에 재인용을 다시 해 본다.
{ 들뢰즈는 '해석의 도덕학' 에서 '역량의 행동학' 으로 가는 이행을 굳건히 뒷받침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개체에 대한 이해와 윤리학 제 2장 명제 13의 '자연학 소론' 을 활용한다. 스피노자는 개체. 신체. 영혼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그것은 형태. 기관. 기능에 의해서도, 실체나 주체로서도 아닌, 하나의 양태, 즉 빠름과 느림의 복합적 관계, 그리고 감응시키거나 감응되는 능력으로서 정의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행동학' 을 구성하는 이 이중의 양태적 규정을 통해 기호. 힘. 역량의 관계를 쇄신한다. '천개의 고원' 과 '스피노자: 실천의 철학' 에서 발전하게 될 이것임은, 들뢰즈의 기호와 이미지에 대한 학설을 결정함과 동시에 형태의 위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주체철학' 을 제안한다. }
[ 들뢰즈와 예술/ 안 소바냐르그 / 이정하 옮김 / 열화당 66쪽에서 인용함.]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
지식과 교양을 쌓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진정성을 가지고 철학을 사유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리고 사유한다는 것은 삶으로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기나긴 위험한 투쟁이다. 답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지식이 아니라 사유로서, 삶과 세상을 바라본다면 진실함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어쩌면 태도와 자세가 백배 아니, 천배 중요한 것이다.
우리 모두 '회의주의자'가 되자. 적어도 한번은 제대로 인생을, 사회를 의심해보자. 그리고 실험하고 모험하자!
20번째 댓글이 진짜 마지막 댓글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그리고 내 인생도 마지막 실험과 모험이 될 수 있기를!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사유한다는것'은 단순하게 잘 사는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크게 보면 철학적으로, 예술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사유를 하는 수단과 방법이 다르겠지만, 결국 동시대에 만연해 있는 상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적으로 사유를 한다는 것은 진보적인 것이다. 위험하지 않으면 철학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상식은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없는 철학은 사유가 아니라 공부이다. 내가 아는 가장 '철학자'다운 '철학자'인 니체는 어느새 '처세술의 달인'이 되어 버렸다. 니체는 자본주의를 개인의 맥락에서 비판했다. 과학이 발전하고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이 되고 그리고 언론까지, 모두가 장미빛 미래를 꿈꾸었던 근대의 미래를 니체는 홀로 비판했다. 절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처세술'을 이야기한 철학자가 아니다. 직접적으로 니체를 '처세술의 달인'이라고 이야기했던, 안했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실험과 모험이 없는 사유는 사실상 '처세술'을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처세술'에 불과한 내용을 '삶의 지혜'로 바꿔치기해도 아는 사람은 그것이 처세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삶을 이야기해도 실험과 모험이 없는 삶이 진정한 삶이겠는가? 자신을 보호할 뿐인 철학을 철학이라고 이야기하지 말자. '철학자'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 내면의 실험이든 구조의 실험이든 실험과 모험으로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을 위험하게 했던 '비실체론적인 철학자들'인 마르크스, 니체, 스피노자, 들뢰즈, 푸코 등과 함께 사유의 모험을 떠나 보도록 하자. 아참! '연기론'을 말씀하셨던 부처와 '공'사상을 이야기한 나가르주나(용수)도 빼먹지 말자.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
제가 댓글에서 자주 인용한 김영진 선생님이 쓴 ‘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나가르주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깃발 없이도 살 수 있다” 우상 파괴자 니체는 실재 세계를 경배하는 것을 수동적 니힐리즘이라고 말했다. '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나가르주나도 루쉰처럼 희망도 거짓이고 절망도 거짓이라고 말한다. 니체식으로 한다면 근거없이 희망을 퍼뜨리는 자는 수동적 니힐리즘이고 세상에 대한 결벽증에 빠진자는 염세적 니힐리즘일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아예 둘 다 부정하기 때문에 거대한 니힐리스트이다.(공이란 무엇인가/지은이 김영진/그린비 130쪽~131쪽 참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니체와 루쉰 그리고 나가르주나(용수)는 서로 닮았다. 어른 된 우리는 젖병을 찾는게 아니라 일용할 가치나 신념을 찾게 된다. 누구는 신과 합일을 염원하고, 누구는 국가의 발전을 갈망한다. 그들에게는 도달해야 할 진실한 세계가 있다. 그것이 인생의 깃발이 되었다. 나가르주나는 저 깃발 내리라고 말한다. 펄럭이는 깃발만큼 우리는 높이 날아오를 수 없다고 말한다. (공이란 무엇인가/ 지은이 김영진 / 그린비 129쪽 참고)
나에게 하는 질문일 수도 있고 여러분 모두에게 드리는 질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깃발 없이도 살 수 있는가?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
{ 그렇더라도 철학은 여전히 중요하지 않을까? 요즘 와서는 중요한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철학을 공부할 제도도, 책도, 다른 경로도 꽉 막혀 있으니. 아무나 방송에 나와 철학을 말하면서 돈 버는 시절이고, '철학'은 허세를 치장해주는 예쁜 장신구에 불과하지 않나? 혹시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마음에 이런 사정이 있지나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굳이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 이유가 중요하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구체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철학을 했다. 일반인도 구체적인 문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철학 책을 읽기 어려운 이유중 하나는 특정 철학자가 어떤 구체적인 문제를 만나서 풀려고 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멋있게 보이려고 철학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위대한 철학자들이 꼭 철학과를 나오고 철학을 전공한 게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철학'을 공부하고, '철학사'를 공부하고, '철학자들'을 공부하는 건, '철학'과 별 상관없는 일이다. 당신은 왜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가? }
[ 생각의 싸움 /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14쪽~15쪽에서 인용함. ]
철학을 사유한다는 것은 철학자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철학함' 을 배우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여기서 '철학함' 은 '철학적 방법론' 을 의미한다. 철학을 통하여 동시대의 삶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철학은 상식을 파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실험과 모험을 통하여 끊임없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식과 교양을 쌓는 것이 철학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듯이, '지식인' 이 모두 '철학자' 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 의 다른 이름은 '회의주의자' 이며, 이는 '허무주의자' 와 다르다. 처세술과 철학적 사유를 혼동하지 말자. 위험하지 않으면 철학이 아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철학자' 가 되고 싶다. 단 한순간이라도 스스로 위험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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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론 작성일
{ 우리는 때론 생명체의 본성을 과장하기도 한다. 우리가 존재의 이유처럼 아끼는 가치나 관념을 나가르주나는 거의 빈정대는 수준으로 비판한다. 어른 된 우리는 젖병을 찾는게 아니라 일용할 가치나 신념을 찾게 된다. 누구는 신과 합일을 염원하고, 누구는 국가의 발전을 갈망한다. 그들에게는 도달해야 할 진실한 세계가 있다. 그것이 인생의 깃발이 되었다. 나가르주나는 저 깃발 내리라고 말한다. 펄럭이는 깃발만큼 우리는 높이 오를 수 없다고 말한다. 아마 이런말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깃발 없이도 살 수 있다." 나가르주나가 보기에 오히려 저 깃발이 우리 삶을 왜곡하고, 사실을 날조한다. 근대인들은 이런 나가르주나를 보고 니힐리즘에 사로잡혔다고 할 것이다. 신을 죽인 니체는 일찍이 서구인들의 형이상학을 이렇게 비판한다.
실재세계. 도달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고, 약속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의 위안으로 생각될 때 조차 하나의 의무이며 하나의 명령인 세계....우리는 실재세계를 없애 버렸다. 무슨 세계가 남아 있을까? 보이는 세계일까? 아니다. 실재세계와 함께 보이는 세계도 없애 버렸다. ( 니체 '우상의 황혼' 41~42쪽)
우상 파괴자 니체는 실재세계를 없애 버린다. 그는 실재세계를 경배하는 것을 수동적 니힐리즘이라고 했다. 그럼 능동적 니힐리즘도 있을 듯 한데, 나가르주나도 니체와 마찬가지로 실재세계는 날조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렇다고 현상세계가 전부도 아니다. 초기 불교가 인생고를 말하기 때문에 분명 염세적인 종교로 보일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염세적 니힐리즘으로 보일 법도 하다. 불교에 염세성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지는 못한다. 이 세계가 진흙탕 같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불교가 턱없이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라고 꾀지도 않았다. 중국의 문호 루쉰은 한때 절필했다. 친구가 찾아와 그래도 글을 써야 하지 않겠냐고 조언한다. 루쉰은 어찌해도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잠에 취한 듯 몽롱한 사람들을 깨우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입에 물릴 뭐라도 있어야 자는 애를 깨우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루쉰은 마음을 고쳐먹고 '광인일기'를 썼다. 그는 말한다.
"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함과 같이." ( 루쉰 '희망'; 다케우치 요시미, "루쉰" 119쪽)
나가르주나도 루쉰처럼 희망도 거짓이고 절망도 거짓이라고 말한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근거없이 희망을 퍼뜨리는 자는 수동적 니힐리즘이고 세상에 대한 결벽증에 빠진 자는 염세적 니힐리즘일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아예 둘 다 부정하기 때문에 거대한 니힐리스트이다. 니체는 니힐리즘에 더욱 철저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니힐리즘의 자기극복이자 능동적 니힐리즘 운동의 촉진이다.( 진은영. '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40쪽) 나가르주나는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공으로, 비실체로 보기 때문에 거기에 빠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또 다른 방식의 긍정이 발생한다. 삶이 공하듯 죽음도 공하고 허무하다. 그런데 이 허무속에 길이 있다. }
[ 공이란 무엇인가/ 지은이 김영진/ 그린비 128쪽~131쪽에서 인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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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론 작성일
{ 들뢰즈는 '해석의 도덕학' 에서 '역량의 행동학' 으로 가는 이행을 굳건히 뒷받침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개체에 대한 이해와 윤리학 제 2장 명제 13의 '자연학 소론' 을 활용한다. 스피노자는 개체. 신체. 영혼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그것은 형태. 기관. 기능에 의해서도, 실체나 주체로서도 아닌, 하나의 양태, 즉 빠름과 느림의 복합적 관계, 그리고 감응시키거나 감응되는 능력으로서 정의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행동학' 을 구성하는 이 이중의 양태적 규정을 통해 기호. 힘. 역량의 관계를 쇄신한다. '천개의 고원' 과 '스피노자: 실천의 철학' 에서 발전하게 될 이것임은, 들뢰즈의 기호와 이미지에 대한 학설을 결정함과 동시에 형태의 위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주체철학' 을 제안한다. }
[ 들뢰즈와 예술/ 안 소바냐르그 / 이정하 옮김 / 열화당 66쪽에서 인용함.]
바로 위에 인용한 '안 소바냐르그'가 쓴 '들뢰즈와 예술'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글이 어쩌면, 제가 생각하는 '마음'을 '실체화' 하지 않는 방법의 '출발점'입니다.
왜 마음을 '실체화' 하는것이 나쁜지는 그동안 충분하게 밝혔기에 생략하겠습니다.
'마음'을 '역량'으로 바꾸면 뭔가 답이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건 역사적으로 대표적으로 '스피노자'와 '들뢰즈'가 정신과 신체를 분리하여 바라보지 않고, 동일한 운동으로 볼 수 있는 훌륭한 개념들과 방법들을 많이 제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을 '실체화'시키는 그리고 마음을 우주의 원리와 연결시키는 대표적인 '실체론'인 '힌두교'에 빠지는 오류를 범했는지는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니체' 또한 훌륭한 '비실체론자'입니다.
'실체론'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키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만들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을 만듬으로써, 현대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정치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진영논리'가 대표적인 '실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평생을 통하여 고민하였던 주제이기도 하고, 오늘날 새롭게 요구되는 '새로운 주체에 대한 구성'에 대하여서도 중요한 답을 주는 인용글입니다.
그리고 제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아래의 인용글입니다.
{ 스피노자는 개체. 신체. 영혼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그것은 형태. 기관. 기능에 의해서도, 실체나 주체로서도 아닌, 하나의 양태, 즉 빠름과 느림의 복합적 관계, 그리고 감응시키거나 감응되는 능력으로서 정의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행동학' 을 구성하는 이 이중의 양태적 규정을 통해 기호. 힘. 역량의 관계를 쇄신한다. ]
{ 들뢰즈와 예술/ 안 소바냐르그 / 이정하 옮김 / 열화당 66쪽에서 인용함.}
이제 진짜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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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도 자주 이야기되고 있는 우주에 대한 언급이 어떤 '초월론적 전제' 가 되어 현실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지 저는 의심합니다. 힌두교에서는 '나' 를 태어나고 죽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불변한 존재'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위의 제 댓글에서 언급했듯이 '브라만' 과 '아트만' 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거창한 우주론을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그저 인간의 틀내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신도 연기된 존재일 뿐이며, 인간과 다르지 않다고. 자신도 모르게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려는 습관이 자칫 '초월론적 전제'에 빠져서 '실체론적 사유' 에 빠질수가 있습니다. "불교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주론' 에 빠지지 말고, 우주로 나아가지도 맙시다. ^^" 마지막으로 아래에, 그의 시대뿐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이단자인 가장 위대한 사상가인 '스피노자'에 대하여 쓴 ‘워런 몬탁’ 의 글을 인용합니다.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비물질적인 영혼이나 정신을 자연계와 결합시켜 영혼이나 정신이 자연계와 끊임없이 갈등하게 하는 물체적 실존을 영혼이나 정신이 초월한다는 신학과 철학의 오랜 논쟁에 반대해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는 동일한 것이며,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물리적 힘은 같은 정도와 같은 방식으로 정신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스피노자가 작성한 가장 혁명적인 주장 가운데 하나는 "신체의 역량이 줄어드는 만큼 정신의 역량도 줄어든다"였다. 자연과 인간을, 신체와 정신을, 행위와 사유를 분리하기 거부한 그는 이로 인해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철저한 반-인간주의자가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시대를 위한 그의 이단을 구성하며, 오늘날 그의 저작이 불러일으키는 특유한 형태의 불가해성과 열망을 해명해 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스피노자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그가 어느 정도 과거에 속하지 않고 현재에 속하는지 그리고 17세기에 고유하게 나타났던 논쟁들이 현재에도 거의 변형되지 않고 얼마만큼 반복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
[ 신체, 대중들, 역량 스피노자와 그의 동시대인들/ 워런 몬탁 지음/ 정재화 옮김/ 그린비 서문 17쪽에서 인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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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사람들 주위를 익숙하게 걸어다니는 비둘기들을 보았다.
마치 나는 법을 잊어버린 새들처럼, 두려움 없이 사람들 주위에서 공짜로 주는 과자를 자연스럽게 잘도 먹는다.
과연 비둘기들은 날 수 있을까? 아니면 날지 않을까?
과연 인간들은 사유할 수 있을까? 아니면 사유하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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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론 작성일그동안 인류가 축적해온 이론적 실천적 자산들을 충분히 이용합시다. 마르크스에 꽂히지 말고, 니체에 꽂히지 말고, 들뢰즈와 푸코에 꽂히지 말고, 조금 세게 이야기해서 마르크스의 개념을 사용하고 버립시다. 그리고 니체의 개념을 사용하고 버립시다. 들뢰즈와 푸코의 개념들을 사용하고 버립시다. 각자의 삶을 위해서 그리고 사회를 위해서 사상가들의 이론과 개념을 어떻게 쓸 것인지? 절실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니체와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최고의 영예는 자신의 철학적 개념들을 독자들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용하고 버리는것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철학이란 동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하고, 옛날 사람들의 말과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철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함(철학적 방법론) 을 배우는 것이기에 옛사람들이나 철학자들의 권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그 시대에 철학적 개념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배우고, 지금 시대에 사용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용하고 버린다' 라고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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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을 낯설게 보는 연습을 하자. 견디기 힘들 만큼 자기 삶을 해석하고 반성하고 직면해야 한다. 그게 철학인 것 같다. 마르크스가 좋으면 마르크스 시선으로 자기 삶을 해석하자.
그리고 떠나자. 쿨하게. 마르크스에 사로잡히지는 말자. 그저 자기 삶을 낯설게 보게 해주었다면 끝이다. 철학은 직면이다. 철학은 우울을 직면하게 하고 오늘의 비루함을 직면하게 하고 낯선 삶을 직면하게 한다.
( 을의 철학/ 송수진 지음/ 한빛비즈 56쪽에서 인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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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비실체론자' 는 부처, 나가르주나(용수), 스피노자, 마르크스, 니체, 들뢰즈 등이다.
'비실체론' 의 다른말은 '관계론' 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실체가 없고 관계와 조건에 따라서 변화와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철학자들' 은 '비실체론자' 이며 상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다. '예술가들' 도 그러하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자들' 은 '예술가들' 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 은 실험과 모험을 즐기는 '위험한 사람들' 이다.
'철학의 가면' 을 쓰고 '실체론' 을 주장하는 '모든 것들' 을 비판하자! '그것들' 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항상 우리들을 유혹하지만, '선한 것들' 이다.
우리 모두 '비실체론자' 가 되자! 이것이 나의 마지막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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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점에서 니체가 생각한 '니힐리스트' 는 '자유 정신'의 소유자다. '자유 정신' 은 절대적 진리도 없고, 영원한 사실도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자유 정신' 은 어떤 것도 절대시하지 않고, 그 어떤 절대적인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자유 정신' 은 이런 자유로움을 통해 비록 자신의 신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니체는 '자유 정신' 을 뱀이 주기적으로 껍질을 벗고 새 껍질을 얻는 '탈피' 에 비유한다. 탈피하지 못하는 뱀이 죽을 수 밖에 없듯이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못하는 '인간의 정신' 역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여러 가지 신념을 가져 본 일이 없는 사람, 최초의 신념에만 집착하는 사람,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은 '낙오된 문화의 대표자' 라고 말한다. }
[ '문성훈 교수의 철학에세이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 / 문성훈 지음 / 이소노미아 83쪽에서 인용함. ]
철학자 '니체' 는 신념을 가진 사람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비상계엄' 의 늪에 빠져있는 위기의 대한민국에서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하는 '진영논리' 에 빠져있는 사람들 또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비상계엄' 에 대하여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누구보다 분노하고 있지만, 진보와 보수의 '진영논리' 는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철학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가장 '철학자' 다운 '철학자' 라고 생각하고 있는 위험한 철학자 '니체' 에 대한 어쩌면 철학에 대한 위의 글을 인용하면서 저의 10번째 댓글을 마친다. 철학자 니체는 대표적인 '비실체론' 을 주장하는 철학자이다. 진보 아니면 보수, 삶 아니면 죽음이 '실체론' 이 아니겠는가? '실체론' 의 위험성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또 다른 맥락에서 우리는 '철학의 위험함' 을 말하고 주장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댓글을 올릴 수 있는 힘도 없다.
안녕히 계십시요.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으로 온 국민이 분노에 빠져 있는 오늘의 암울한 현실에서 현실의 운동과 철학적 개념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를 보여주는 아래의 글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올렸던 철학적 사유에 대한 글들과 제 나름대로는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이 되어 인용합니다. 저는 아래 댓글에서 이야기했던 '스피노자의 행동학'과 '들뢰즈의 철학'을 통해서 결국은, 철학과 예술이 정치로 갈 수 밖에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혁명적 과정이 그렇듯이 68혁명 역시 장기간에 걸쳐 실현되었다. 급진적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강렬한 에너지원이 되어서 20세기 후반 내내 현대 프랑스와 유럽의 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들뢰즈는 당시 리옹대학교의 강사였는데, 즉각적으로 이 운동에 지지를 표명하고 자신의 집 창문에 깃발을 내 걸었다. 이것은 당시 대학에 속한 연구자들이 보여준 반응 중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68년 5월은 전례 없는 형식의 사건이었고 그만큼 많은 학자가 특유의 신중하고 보수적인 태도 속에서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들뢰즈가 1970년대에 쓴 사회철학 저작들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당에 의지하지 않는 조직 없는 다수의 운동은 "욕망하는 기계", "기관 없는 신체", "유기적으로 조직되지 않는 다양체", 같은 개념에 담겨졌다. 이러한 장면은 현실의 운동과 철학적 개념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들뢰즈 괴물의 사유/ 이찬웅 지음/ 이학사 16쪽에서 인용함. }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
조금 어려운 이야기이고, 사실 제 자신도 고민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결국 저는 '신체와 정신의 문제' 가 조금 거창하게 이야기해서 아래와 같은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새로운 '주체철학' 의 전망을 가질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참고로 저는 학문을 연구하는 지식인이나 연구자가 아님을 밝힙니다. 그냥 철학을 좋아하는 한사람일 뿐입니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 글일것 같습니다. 부처의 '연기론' 과 나가르주나(용수)의 '공' 사상이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철학과 사상에 닿아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요? 저는 충분히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만날 수 있고, 현재의 우리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결국 철학이란 개념을 통하여 현실에 개입해 현실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킬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저는 들뢰즈가 '해석의 도덕학' 에서 '역량의 행동학' 으로 가는 이행을 굳건히 뒷받침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개체에 대한 이해와 윤리학 제 2장 명제 13의 '자연학 소론' 을 활용하는 아래의 글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결국 ‘역량의 행동학으로 가는 이행의 중요성’ 을 향후 제 고민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들뢰즈는 '해석의 도덕학' 에서 '역량의 행동학' 으로 가는 이행을 굳건히 뒷받침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개체에 대한 이해와 윤리학 제 2장 명제 13의 '자연학 소론' 을 활용한다. 스피노자는 개체. 신체. 영혼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그것은 형태. 기관. 기능에 의해서도, 실체나 주체로서도 아닌, 하나의 양태, 즉 빠름과 느림의 복합적 관계, 그리고 감응시키거나 감응되는 능력으로서 정의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행동학' 을 구성하는 이 이중의 양태적 규정을 통해 기호. 힘. 역량의 관계를 쇄신한다. '천개의 고원' 과 '스피노자: 실천의 철학' 에서 발전하게 될 이것임은, 들뢰즈의 기호와 이미지에 대한 학설을 결정함과 동시에 형태의 위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주체철학' 을 제안한다.
들뢰즈와 예술/ 안 소바냐르그 / 이정하 옮김 / 열화당 66쪽에서 인용함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
위의 댓글에서도 인용하였지만, '고정된 실체론' 을 이야기하고 있는 힌두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아래와 같은 내용을 재인용합니다.
아래의 글을 통하여 불교가 부처의 연기론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힌두교와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나를 육체가 아니라, 육체에 내재해 있는 아트만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태어나고 죽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불변의 존재다. 아트만은 세계의 근원이자, 영원불변의 참된 실재인 브라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브라만과 아트만의 관계는 알 듯 모를 듯 하지만, 비유적으로 생각해보면 무슨 뜻인지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세종대왕이 지었다는<월인천강지곡>이라는 찬가의 제목은 하늘에 떠있는 달은 하나지만, 1000개의 강에 달이 비쳐져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1000개의 강의 모습은 각기 다르지만,여기에 비쳐진 달이 모두 같은 달이듯,브라만은 하나이지만,수많은 개별적 사물에도 존재한다.
문성훈 교수의 철학에세이,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문성훈 지음/이소노미아 65쪽~66쪽에서 인용함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
용기를 내서 조금만 더 이야기해보면, 우리는 마음에 대하여 자신도 모르게 '실체화' 하며 사유하는 아주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 우리는 아주 당연하게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며, 생각을 너무 물질적으로 한다며 성토합니다. 물질의 문법에 익숙해지지 말고, 물질로 환원시키지 말고, 마음의 문법을 다루는 방식을 이야기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게 보입니다. 사실 불교에서 아주 흔하게 '마음' 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부처의 '연기론' 에 부합하냐? 는 부분은 한번 고민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자연과 인간을, 신체와 정신을, 행위와 사유를 분리하기 거부한 사상가는 바로 '스피노자' 입니다. 스피노자는 일관되게 그의 전 생애를 거쳐서 정신과 신체는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우주와 '등가관계' 이며, '우리들 각자는 이미 완벽한 존재이며, 우리들 각자는 이미 부처이다' 라는 불교의 주장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좋은 말' 같지만 아래에서 제가 이야기한 힌두교의 '브라만' 과 '아트만' 이라는 개념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지 않습니까? 불교는 당연하게 '비실체론적인 사유' 라는 것은 부처의 '연기론' 을 통해서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불교를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실체론적인 사유' 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직 불교에는 힌두교적인 영향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힌두교와 인연을 끊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화엄불교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테제가 있습니다. '일즉다 다즉일' 풀이를 해 보면 "개별자는 전체이고 전체는 곧 개별자다"라는 논리입니다. 과거에 '노동의 새벽' 이란 시집을 통해서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온몸으로 노래한 시인 '박노해' 는 화엄불교의 유명한 테제인 '일즉다 다즉일' 의 논리를 설명하는데 자주 사용된 '인다라의 그물' 비유를 인용한 시를 발표하며, 과거와는 다른 대립과 갈등이 아닌 궁극적인 조화의 논리를 말합니다. 과거 '박노해' 가 썼던 '노동의 새벽' 이란 시집을 읽으며 '노동해방' 을 위해 헌신하던 사람들은 그의 변신을 일종의 변절로 여겼습니다. 시인 박노해가 변절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지평으로 비약한 것인지?에 대하여 철학자 강신주는 아래와 같은 책에서 물음표를 던집니다.
{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강신주 지음/ 동녁 기쁨의 연대 네그리와 박노해 }
불교에서도 자주 이야기되고 있는 우주에 대한 언급이 어떤 '초월론적 전제' 가 되어 현실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지 저는 의심합니다. 힌두교에서는 '나' 를 태어나고 죽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불변한 존재'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위의 제 댓글에서 언급했듯이 '브라만' 과 '아트만' 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거창한 우주론을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그저 인간의 틀내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신도 연기된 존재일 뿐이며, 인간과 다르지 않다고. 자신도 모르게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려는 습관이 자칫 '초월론적 전제'에 빠져서 '실체론적 사유' 에 빠질수가 있습니다. "불교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주론' 에 빠지지 말고, 우주로 나아가지도 맙시다. ^^" 마지막으로 아래에, 그의 시대뿐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이단자인 가장 위대한 사상가인 '스피노자'에 대하여 쓴 ‘워런 몬탁’ 의 글을 인용합니다.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비물질적인 영혼이나 정신을 자연계와 결합시켜 영혼이나 정신이 자연계와 끊임없이 갈등하게 하는 물체적 실존을 영혼이나 정신이 초월한다는 신학과 철학의 오랜 논쟁에 반대해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는 동일한 것이며,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물리적 힘은 같은 정도와 같은 방식으로 정신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스피노자가 작성한 가장 혁명적인 주장 가운데 하나는 "신체의 역량이 줄어드는 만큼 정신의 역량도 줄어든다"였다. 자연과 인간을, 신체와 정신을, 행위와 사유를 분리하기 거부한 그는 이로 인해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철저한 반-인간주의자가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시대를 위한 그의 이단을 구성하며, 오늘날 그의 저작이 불러일으키는 특유한 형태의 불가해성과 열망을 해명해 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스피노자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그가 어느 정도 과거에 속하지 않고 현재에 속하는지 그리고 17세기에 고유하게 나타났던 논쟁들이 현재에도 거의 변형되지 않고 얼마만큼 반복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신체, 대중들, 역량 스피노자와 그의 동시대인들/ 워런 몬탁 지음/ 정재화 옮김/ 그린비 서문 17쪽에서 인용함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
'감이당' 에서 답변도 없고, 그리고 자유게시판으로 옮겨주신 덕분에 조금 더 과감하고 자유롭게 저의 주장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실체론' 인 불교는 '고정된 실체' 를 주장하는 인도철학 그리고 인도종교인 '힌두교' 와 인연을 끊고, 부처의 연기론, 용수(나가르주나)의 '공' 사상,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 과 함께 '철학적 사유'를 할 준비를 하도록 하자!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
[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함과 같이. (루쉰 '희망' : 다케우치 요시미 "루쉰" 119쪽)
나가르주나도 루쉰처럼 희망도 거짓이고 절망도 거짓이라고 말한다. 니체식으로 하자면 근거없이 희망을 퍼뜨리는 자는 수동적 니힐리즘이고 세상에 대한 결벽증에 빠진 자는 염세적 니힐리즘일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아예 둘 다 부정하기 때문에 거대한 니힐리스트이다. 니체는 니힐리즘에 더욱 철저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니힐리즘의 자기극복"이자 능동적 니힐리즘 운동의 촉진이다.(진은영 니체, '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40쪽) 나가르주나는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공으로, 비실체로 보기 때문에 거기에 빠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또 다른 방식의 긍정이 발생한다. 삶이 공하듯 죽음도 공하고 허무하다. 그런데 이 허무 속에 길이 있다. 찰나멸을 연구하는 어느 학자는 죽음 극복의 비법을 이렇게 일러준다.
무상을 정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상으로부터 도피해서도 안된다. 무상에 투철함으로써 비로소 실체화된 죽음의 공포가 무상화되는 것이다. 무상은 무상에 의해서 무상하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비탄하고 걱정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렇지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너무나 직접적이게 되면 죽음이 거기에 없다. (타니 타다시 무상의 철학 31쪽)
여기서 무상은 누가 죽어서 느끼는 상실감이 아니라 공이라고 불러도 된다. 삶도 무상하고 죽음도 무상하다. 삶과 죽음이 손맞잡고 있음을 나가르주나는 일찍이 설파했다. 생의 환희에 자신을 가두지 말고, 죽음의 공포로 자신을 위협하지 마라. 환희와 공포를 가르는 경계는 없다. 그런데도 하나는 환희이고 하나는 공포일수가 있는가. "무상은 무상에 의해 무상하다." 죽음은 공하기 때문에 실체론적인 공포에 빠져들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죽음에서 거짓 이름으로서 '죽음' 만 본다. 딱 그만큼만 본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실험을 한번씩 해봐도 된다. ]
{ 공이란 무엇인가 / 지은이 김영진 / 그린비 130쪽~132쪽에서 인용함 }
다시 한번 자유롭게 감이당에 제안하는 내용이나, 강좌나 세미나에 대하여 문의하는 내용의 글을 올릴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제안하면서 제가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인상적이라고 느꼈던 위의 글을 인용합니다. 과연 '브라만' 과 '아트만' 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고정된 실체' 를 이야기하고 있는 '힌두교' 가 불교의 연기론, 용수의 '공' 사상과 어떻게 다르게 사유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제 질문의 핵심은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불교를 철학적으로 사유할수 있는가?'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핵심은 힌두교처럼 '고정된 실체론' 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관계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게 되는 '비실체론' 인데 이에 대하여 '감이당' 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역사적 조건' 을 바꿈으로써, 다른 세상, 다른 인간이 출현할 것이라는 신념으로 이어지는 '마르크스' 의 '역사유물론' 처럼 불교도 '연기론' 을 통하여 충분하게 이런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대승불교' 를 철학적으로 완성하고 부처에게서 '연기법' 을 선물받았다고 말하는 '용수(나가르주나)' 의 '공' 사상을 통하여 우리는 이런 내용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힌두교의 '고정된 실체론' 보다는 '대승불교' 에서 말하는 '초기불교' 의 '연기법'이나 '무아설' 을 통하여, 그리고 이런 '연기법' 이나 '무아설' 을 통하여 출현한 개념인 '공' 개념을 통해서 철학적으로 불교를 사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감이당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불교가 '인간의 고통' 으로부터 탄생한 종교이고 결국, 종교적 구원이 '종착점'일 수 밖에 없는 점은 이해하지만, '철학적 사유' 와 '종교적 구원' 은 분명하게 다르다는 점을 밝힙니다.
연기론님의 댓글
연기론 작성일제 글을 '자유게시판' 으로 옮긴 이유는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 제 글이 '자유게시판' 에 어울리는 글일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면에서 보면 감이당에 제안하는 내용일 수도, 있고 감이당에서 하고 있는 강좌나 세미나에 대하여 문의하는 글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자유롭게 감이당에 제안하는 내용이나 강좌나 세미나에 대하여 문의하는 내용의 글을 올릴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제안하여 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위의 댓글에서 질문하고 있는 내용에 대하여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